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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독서기록

187. 도망가자-20.11.26~11.27

by 독서의 흔적 2020. 11. 28.

에세이 도망가자 종이책 김민지, 김수지
박예은
썸머코어
지구기지 1호
★★★★☆

 

 

후기: 시작은 도망이었지만, 앞날은 안녕하길

<우리들의 삶은 동사다>를 읽은 후 알수없는 기운에 사로잡혀 텀블벅에서 펀딩이란 펀딩은 다 참여했다.

<도망가자>는 성폭력 생존 피해자 셋이 제주도 한달살이를 하며 쓴 일기를 편집한 에세이집이다.

"저희 책인, <도망가자>가 잡아주는 손이 되어주고, 도망칠 수 있는 곳이 되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란 편지 글이 인상적이었다.

정갈한 글씨 위에 떨리는 마음이 고이 담겨진 듯했다. '이 일기를 독자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염려.

하지만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푹 빠져서 읽었다.

 

이들의 시작은 도망이었지만, 나아갈 내일은 안녕할 것만 같다.

전혀 일면식이 없음에도, 셋이 함께라면 어디서든 괜찮으리라는 굳은 믿음이 생겼다.

모아둔 돈으로 제주도 한달살이에 도전하고, 모자란 돈은 뚜벅이 어플을 이용해 충당했다. 

하루를 조깅으로 시작해, 종일 뚜벅뚜벅 걷는다. 제주도 곳곳을 아주 세심하게 살핀다.

한적한 숲을 거닐다 낯선 발자국 소리에 온 몸이 긴장한다. 황급히 찾아나선 입구 앞에서 숨을 몰아쉬며 작게 웃는다.

걸음 하나 하나, 내쉬는 숨 한 모금 한 모금이 내일을 살아가기 위한 작은 발버둥이었다. 고요한 외침이었다. 

 

가만한 목소리를 듣다보니, 덩달아 뭐든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조용히 펜을 들었다.

그날 내 기록은 이렇게 시작했다. "근무 시작한 지 한 달만의 일기."

한 몇 달 열심히 쓰던 일기를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내팽겨치고는 잊고있었다.

펜 끝으로 이야기를 빚어내는 동안 종이 위에 하나 둘 그려지는 내 모습이 퍽 낯설었다.

솔직한 감정을 직면하는 것이 두렵기도 했고, 이게 내 감정이고 과거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차마 펼쳐보지 못한 두려운 일기들이 많다"는 수지님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급히 쓰고는 다시는 펼쳐보지 못하는 페이지가 있었고, 마음 속에 고이 넣어둔 부끄러운 이야기가 한가득 있었다.

타인의 눈은 지긋이 잘만 쳐다보면서, 정작 나 자신을 마주하는 것은 아직도 어렵기만 하다.

"사진첩에 쌓인 몇백 장의 사진과 동영상은 언제, 어디서든 우리를 그 시간으로 불러들일 것이고

우리는 만날 때마다 더 좋은 미래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처럼 그때 참 좋았지, 할 것이다.

잊고 싶지 않은 것을 어떻게 기억할지 고민했던 날들이 있었다. 이렇게 하면 된다.

사진으로 남기고, 글로 남기고, 기억하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떠들면서, 잊고싶지 않다고 생각하면 된다."

언젠가 나도 이렇게 말하겠지. "그때 참 좋았지"

 

셋은 '그때 참 좋았'다. 서로 부둥켜안고 활짝 웃는 사진이 어찌나 맑고 이쁘던지.

웃음과 웃음 사이에 서로를 향한 신뢰가 가득 묻어나왔다. 세상 모든 어두운 것이 알아서 물러날 듯한 웃음이었다.

6년, 그리고 1년만에 상담을 결심했다는 수지님과 예은님.

부디 모두가 눈물보다 웃음이 많은 날로 가득했으면 좋겠다.

그때 참 좋았고, 앞으로도 참 좋을 거예요. 환하고 따스한 빛이 늘 함께 하길.

 

 

인상깊은 구절

1. 동정으로 가득 찼던 눈동자들은 가끔 혼란스러워 보였는데 그는 우리가 목소리를 너무 크게 냈기 때문이다.

대자보를 붙이고 울지 않고, 주눅 들지 않고, 힘들어 보이지 않아서, 피해자답지 않아서.

우리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의 눈동자는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지만, 우리를 동정하는 이들의 눈동자는 자주, 흔들렸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겠지만, 우리의 생각보다 어른들은 더럽고 치사했던 거다. 그들 앞에서 나는 수일 동안 말을 잃었다.

 

2. 떠나는 일이 얼마나 무겁고 중요한 것인지 매번 생각한다. 두고 오는 것이 너무 많아 마음이 떨어지지 않던 여행이 많았다.

내가 두고 온 것들은 그들만의 시간과 속도로 흐르는데 나는 그 시간을 함께하지 못하는 게 아쉬워 떠나는 길마다 미련을

뚝뚝 흘리며 내 여행을 망쳤던 어린 날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 날 무겁게 하는 것은 없었다.

나는 이제야 온전히 나를 위해 떠날 수 있게 됐다.

 

3. 함께하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있거나 함께이기를 갈망하다가도 이렇게 자주 적막해지고 싶다.

나는 어째서 이렇게나 혼자인 것을 즐기는 사람일까. 연

결감을 항상 바라지만 한편으로 다분한 귀찮음을 느끼는 사람, 그러면서도 혼자 하는 일에는 어색함을 느끼는 사람.

그래도 인생은 적응과 익숙해지는 것의 연속이라 혼자 먹는 파스타와 한라토닉쯤이야, 이제 껌이다!

 

4. 제주도에서 일상을 살다 보니 다른 꿈을 꾸게 된다. 이렇게 살아보고 싶기도 하고 저렇게 살아보고 싶기도 해진다.

항상 어떻게 살까, 고민만 하다 이렇게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들면 힘이 난다. 유효기간이 짧은 미지근한 열정.

 

5. 우리는 촘촘하게 밀린 시간을 채워 넣었다. 함께 보말을 줍고, 숲길을 느리게 걷고, 손을 잡고 조잘대고, 같은 풍경을 보고,

웃으며 사진을 남겼다. 너무 빛이 나고, 너무 사랑하지만 동시에 벌써 그리워져 버리는 시간들.

이 그립고 그리울 시간들이 날 지탱하는 힘이기만 했으면 좋겠다. 어떤 종류의 울음이라도, 벌써 보일 일은 아니잖아.

나는 어리광을 부리는 어른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키워드: 제주도, 한달살이, 뚜벅이, 한라산 등정, 일기,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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