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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독서기록

113. 목소리를 드릴게요-20.07.22~07.25

by 독서의 흔적 2020. 7. 26.

 

한국소설 목소리를 드릴게요 종이책 정세랑 아작 ★★★★★

 

후기 '아무튼, 정세랑'

확신에 찬 단단한 다정함.

'한결같은 사람'은 정세랑을 가리키는 단어일 것이다.

소설집에 수록된 2010년작부터 2019년작에 이르기까지 손 끝에 닿는 메시지가 한결같다.

한 사람의 심지가 이렇게까지 선량하고 단단하고, 올곧을 수가 있을까.

그가 표현하는 사랑은 유독 특별하게 느껴진다. 절절하고 마음이 동하게 한다.

화려한 수식어 없이도 문장에서 온갖 감정과 아름다움이 흘러넘친다.

이를 세랑어() 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소설집을 읽더라도 늘 첫 페이지부터 읽던 강박증을 잠시 접어두고 마음 내키는대로 읽어봤다.

하나쯤은 안 맞겠지 싶었는데, 다 재밌었다. 이렇게까지 재밌으면 후기 쓰는 것도 힘들다.

내게 <목소리를 드릴게요>는 이야기 흐름이 자극적이거나 유해하지 않아도 충분히 재미있음을 보여준, '선한' 소설집이다.

이 선함이 모이고 고여서 언젠가 '우리와 닮지 않은 존재'를 지켜낼 것이라고 믿는다.

없던 애정까지 샘솟게 만드는 세랑월드 최고네....

 

모든 단편이 재미있었지만, <모조 지구 혁명기>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나는 이종족에 강한 매력을 느끼나보다.

미치광이 과학자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창조주 디자이너에게 맞서싸우는 피조물들의 용기에 가슴이 웅장해졌다.

특히 천사가 제 손으로 창조주를 해치울 때는 기분 좋은 전율이 일었다.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아닌, 그저 권리를 되찾고자 하는 혁명은 쓸데없는 희생없이 조용히 마무리 된다.

이보다 아름다운 혁명이 어디있으랴.

부디, 고양이 인간들이 높은 빌딩에서 뛰어내리다 모두의 이목을 끄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바이다.

 

미래에서 지구를 지키기 위해 거대지렁이 군단(?)을 보낸 <리셋>도 빼놓을 수 없겠다.

거대지렁이들은 온갖 건물과 사람을 먹어치우고, 배설하며 지구를 정화시킨다.

게으른 인간의 3대 조건인 먹고, 싸고, 자고가 지렁이에게는 지구를 구하는 최적의 능력이 된 것이다.

읽는 내내 '어휴, 지렁이 보낼 정도면 굉장히 친절하네. 너무 무해하다.' 고 생각했다.

일방적인 파괴가 아닌, 파괴 후의 수복까지 고려한, 그야말로 친환경적인 침략이다.

이제 비 오는 날 마주치는 기다란 지렁이를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것 같다.

 

<보건교사 안은영>, <목소리를 드릴게요> 고작 두 작품만 읽었지만, 세랑작가의 공통분모는 쉽게 찾을 수 있다.

바로 환경문제이다. ‘멸종위기종 일러스트를 박아넣은 텀블러와 에코백’, ‘배달음식이 인기를 얻으면서 급증한 일회용기’,

재고가 넘쳐나는 대량생산품등 작가의 시선은 늘 지구에 해를 끼치는 과정과 행동 그 너머에 닿아있다.

인간쯤은 지구를 위해서 없어져도 괜찮아를 활자로 그려내는 작가.

조금만 힘이 실려도 과격하게 받아들여질 법한 이야기를 둥글게 둥글게 잘 풀어낸다.

감히 정세랑 작가만이 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라고 말하고싶다.

그의 글을 읽은 사람은 더 이상 환경문제와 본인을 떼어놓을 수 없을 것이다.

당장 나만해도 책장에 줄을 긋기 위해 마스킹테이프를 구매했다. 제로웨이스트는 힘들겠지만, 점차 줄여보려고 한다.

책장을 넘어 손 끝으로 전해지는 메시지. 이토록 선하고 분명한 메시지가 또 어디있을까.

그의 매력은 환경뿐만이 아니라 모든 소수자를 포용하고 있다는 데에 있지만, 더 언급하면 길어질 듯하니 생략하고자 한다.

아직 만나보지 못한 다른 작품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을까. 기대되면서도 무섭다. 

편의를 위해 온갖 쓰레기를 허용하던 나를 혐오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어찌됐든. 아무튼, 정세랑이다.

 

+) 어쩌다보니 작가 찬양이 되어버린 듯 한 후기.

하지만 읽은 이상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정세랑은 그런 작가다.

늦게 읽어서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네. 아직 손에 넣지 못한 작품들을 살지 말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구병모 작가도 그렇고 창비에서 출판한 작품이 왜 이렇게 많은 겁니까...

 

+) '피하지방층이 얇아지며 우아하게 드러난 얼굴 뼈와,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감정을 자유자재로 표현하는 섬세한 가로 세로 선들, 기량이 최고조에 달한 성대'

이 표현이 너무 좋아서 한참을 읽고 또 읽었다. 세월이 남긴 흔적을 이렇게 다정하고 우아하게 그리다니... 참 따숩다.

 

인상깊은 구절

1. 기준 오빠는 저의 기준이 되어버렸던 거에요. 누굴 만나도 그때 오빠가 내 손에 작은 돌멩이들을 쥐여줄 때의

친밀감과 충족감을 느낄 수는 없었어요. 펭귄 수컷처럼 돌을 선물하던 남자 때문에 제 나머지 연애들은 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2. 저는 원래 사람을 안 좋아하는데, 열한 명 중의 한 명 정도만 좋아하는데, 혜정 씨는 그 한 명 쪽이에요.

혜정 씨를 좋아해요. 좋아했어요. 함께 점심을 먹을 때가 하루 중 제일 나은 시간이었습니다.

 

3. 재활용은 자기기만이었다. 쓰레기를 나눠서 쌓았을 뿐, 실제 재활용률은 형편없었다.

그런 문명에 미래가 있었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4. 인류는 더 이상 인류를 위해 다른 종을 굴절시키지 않는다.

 

5. 끊임없이 바라봐야 하는 얼굴의 여왕이 다스리는 태평성대였고 백성들은 그저 찬탄했다.

 

6. 마치 수용소가, 세계가 연선을 사랑해서 담뱃재조차 닿지 않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참 이상한 존재. 우주의 사악한 톱니바퀴에 으스러지지 않는 모호한 존재.

 

7. 승균은 전혀 엉뚱한 말을 남겼다. 하필이면 사랑이 일목 대상인 일목인처럼.

물거품이 될 각오가 선 인어처럼. “목소리를 드릴게요.”

 

8. 완벽한 풍경이었다. 하루를 더 살아남는다 해도, 그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기 위해 다시는 내다보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런 완결정이 사람에겐 필요한 것이다. 운동선수에게 메달이 필요하듯이.

 

9. 승훈을 이루던 많은 부분은 이미 먼지가 되어 저 밖에 있는 모양이었다. 분명 빛나는 먼지일 것이다. 메달처럼 반짝이는.

 

키워드: 엄지 손가락, 에우로파, 지렁이, 모조 지구, 알츠하이머, 목소리, 대멸종, 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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