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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독서기록

173. 우리들의 삶은 동사다-20.10.29~10.31

by 독서의 흔적 2020. 11. 1.

사회문제 우리들의
삶은 동사다
종이책 김지현, 김효진,
이미경, 이소은,
이어진, 정정희
이매진 ★★★★★

 

후기 '살아가기 위한 끈질긴 투쟁의 기록'

참으로 우여곡절 많았던 책이다.

하단부 변색으로 교환도 두번, 환불도 한번, 출판사에 문의 메일도 몇 번 보냈다.

이대로 포기해야하나 싶었을 때, 출판사 답변을 받고 그냥 품고가기로 결정했다.

6년간 어둑한 창고에서 간절하게 독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책.

그리고 드디어 많은 독자를 만나게 된 책.

온전한 책을 받기위해 고군분투(?)했던 여정이 연대의 손길로 이어지는 상황을 보고있으니,

참여 작가들이 바라던 모습이 이런 것이었겠구나 싶어 가슴이 뭉클해진다.

(본인은 해당 출판사와 아무 관련이 없으며, 그저 멀쩡한 책이 갖고싶었던 집책광공이다...)

 

일전에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를 읽으며 많이 울었더랬다.

치밀어 오르는 욕을 참을 수 없어, 후기작성을 포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생존자가 이미 가해자를 용서한 마당에 내가 욕을 한 들 달리 어찌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우리들의 삶은 동사다>도 그랬다.

끊임없이 한숨을 내쉬었고, 답답하고 분통한 나머지 베개를 쿵쿵 내리쳤으며, 호흡곤란을 느끼기도 했다.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상상해서도 안될 고통이었지만, 절로 공감하게 되는 고통이었다.

생존 기록을 남김으로써, 더 많은 생존자들과 연대하고싶음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동시에 '왜 저런 행동을 하는 걸까. 열림터의 규칙에 순응할 수는 없는걸까. 어쨌든 도와주는 사람들인데'

하는 나의 생각이 '도움 받는 피해자다운 태도'를 요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자 한없이 부끄러웠다.

인생사 그렇듯이, 생존자들의 삶도 가지각색의 모습을 하고 있다.

혹자는 규칙을 꼬박꼬박 지키며 자립을 준비하고, 혹자는 규칙을 몰래몰래 어겨가며 통 적응하지 못했다.

학창시절에, 직장생활을 하며 보아온 여러 모습과 같았다.

피해사실을 떠나,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 사회의 낙인과 편견에 맞서싸우는 사람들이었다.

누군가는 가해자를 용서하고, 누군가는 가해자를 동정하고,

누군가는 가해자를 언젠가 죽일 그날을 기다리며 힘차게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혹자는 이런 모습을 보며 '피해자답지 않게 씩씩하다'고 손가락질을 한다.

(실제로, 트위터에서 '생존자가 왜 그렇게 성관계를 좋아하냐'는 무례한 질문을 던진 이를 보았다.)

"친족 성폭력은 분명히 심각한 일이다. 그러나 그 일이 한 사람을 영원히 규정할 수는 없다.

'씻을 수 없는 상처'라는 편견은 피해자를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될 뿐 아니라 피해자를 더 무력하게 만든다.

친족 성폭력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치유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질 때 자기 피해를

드러내는 피해자들의 행동도, 치유의 발걸음도 훨씬 가벼워질 것이다."

 

'성폭력은 일생에 있어서 치명적인 상처'라는 인식은 생존자들을 주저하게 만든다.

상처가 어느정도 회복되었음에도, 상처가 여전하지만 일상을 살아가야함에도,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 움츠리게 한다.

생존자 또한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 이들은 언제까지고 피해사실에 얽메여 도움과 원조 아래서만 살아야 할까.

한국 사회는 성폭력을 대수롭지않게 생각하면서도, 회복되지 못할 치명적인 상처로 인식한다.

활동가와 생존자들은 이 모순적인 상황과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과거에 비해 생존자들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 관심도는 '피해사실'에 방점이 찍힐 뿐, 이후의 삶에는 냉담한 것이 현실이다.

<우리들의 삶은 동사다>는 생존자들의 과거, 현재, 꿈꾸는 미래를 그린다.

이 책은 생존자들의 과거사임과 동시에 격동의 현대사이다.

책이 열고자 하는 포문은 6년간 조금씩 열리다가 이제야 활짝 열리게 되었다.

부디 이 관심이 지속되기를. 더 많은 생존자들이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분노를 동력으로 삼아 사회를 바른 곳으로 이끄는 것은 우리가 도울테니,

생존자들은 살아가는 것에 집중할 수 있길 바란다. 당신들에겐 그럴 권리가 있다.

모든 피해는 생존자들의 잘못이 아니므로.  

 

 

인상깊은 구절

1. 어느 누가 친아버지에게 입은 성폭력 피해 경험을 남자 친구하고 한 성관계로 착각할 수 있을까? 

이렇게 피해자의 성관계 경험을 들춰내 공개된 자리에서 수치심을 자극하는 행동은

'성관계를 이미 경험한 여성이라면 보호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보는 뿌리 깊은 정조 관념을 유지하고 강화한다.

 

2. 성폭력 피해 때 몸으로 느낀 쾌감 때문에 적지 않은 피해자들이 고통스러워한다. '성폭력을 당햇다면 당연히 그 순간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라는 사회적 편견이 뿌리 깊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피해자가 자기 몸이 보인 반응에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느끼게 만드는 '사회적 각본'이다. 성적인 접촉은 물리적 반응이기도 해서 자극을 하면 당연히

쾌감이나 불쾌감이 따라온다. 일곱 살 때부터 성년이 될 때까지 사랑인지 폭력인지 분간하기도 어렵게 교묘히 진행된

아버지의 성폭력. 자신의 성적 욕망을 미처 마주하기도 전에 왜곡된 방식의 성적 자극에 노출 돼 길들여진 몸의 반응을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성적 쾌감 때문에 생기는 죄책감을 더는 피해자의 몫으로 남겨두면 안 된다.

 

3. 성폭력 사건 재판에서 피해자는 당사자가 아니라 사건의 '증인'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피해자가 재판부의 판결만

기다리지 않고 자기가 아는 진실을 적극적으로 주장할 때 사건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진아는 생생히 보여줬다.

 

4. 우리 사회에서 가족은 마지막 보루이자 반드시 지켜야 할 울타리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은 이 울타리 안에서

성폭력을 경험하고 침묵을 강요받는다. 성폭력 사건이 알려지면 가족이라는 안전한 울타리가 무너진다고 생각한

가족 구성원들은 이 울타리를 지키려고 약자인 피해자를 외면한다. 그리고 강자에 의지해 겉으로라도 '정상 가족'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그렇게나 절박하게 지키려고 한 가족은 과연 누구를 위한 보루일까.

대체 누구를 지키고 보호할 수 잇는 울타리인 걸까.

 

5. 친족 성폭력 사건에서 유죄 판결은 단지 법적인 인정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가해자를 고소한 행위가 정당하다는 점을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통로가 바로 유죄 판결이기 때문이다. 법적 인정은 피해자가 막연한 죄책감을 떨치고

성폭력이 자기가 아니라 가해자의 잘못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유죄 판결은 성폭력 피해를 인정받고 치유의 첫걸음을 내딛는 출발점이자 디딤돌이다.

 

6. 치유의 과정에 정해진 도식은 없으며, 모두 각자의 속도가 있다. 수희는 수희의 속도로 변화의 계기를 만날 것이다.

그 계기는 더는 참을 수 없는 통증일 수도 있고 가해자 탓을 하는 게 진절머리 나는 순간일 수도 있다.

마음을 열어 보일 수 있는 한 사람일 수도 있다. 삶의 길목에 서 있다가 수희가 원할 때 언제라도 손 내밀고 싶다.

 

7. 우리 모두 그렇듯이 피해자도 때로는 잘 살기도 하고 때로는 잘 못 살기도 한다.

이 모든 시기를 자기 삶으로 받아들이며 주어진 과제를 해결해가는 사람이 피해자다.

친족 성폭력은 분명히 심각한 일이다. 그러나 그 일이 한 사람을 영원히 규정할 수는 없다.

'씻을 수 없는 상처'라는 편견은 피해자를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될 뿐 아니라 피해자를 더 무력하게 만든다.

친족 성폭력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치유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질 때 자기 피해를 드러내는 피해자들의 행동도, 치유의 발걸음도 훨씬 가벼워질 것이다.

 

8. 이 책의 주제가 친족 성폭력 '피해'이기 때문에 피래를 중심으로 삶의 서사를 엮을 수밖에 없었다.

독자들이 피해자의 일상에는 피해와 고통만 가득하다고 받아들이거나 피해자를 문제가 많은 사람으로 여기게 될까봐 염려스럽다.

피해자에게는 상처와 결핍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유머와 웃음이 묻어나는 일상이 있다.

피해자들은 피해 경험을 감싼 희로애락의 파도 위에서 넘실대고 있다. 자기도 "남들이랑 똑같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고통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없다. 고통을 있는 힘껏 통과하면서 그 고통을 새롭게 해석하고 다른 의미로 전환시키려고

애쓰는 이들은 피해자에 머무르지 않는 '생존자'다. 그리고 자기 경험을 세상에 이야기함으로써 또 다른 생존자의 아픔에

손을 내민 '치유자'기도 하다. 살아줘서, 이야기해줘서 참 고맙다.

 

 

키워드: 친족 성폭력, 생존자, 열림터, 쉼터, 한국성폭력상담소
꼬리(연결고리):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친족 성폭력 생존자 중 한명인 김영서 작가의 책. 살아줘서, 이야기해줘서 고마운 책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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