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소설 | 쓰지않을 이야기 | 종이책 | 조수경, 김유담, 박서련, 송지현 |
arte | ★★★★★ |
후기 '약자의 생존이 역사가 되는 그날을 기다리며...'
네 여성작가가 그리는 팬데믹 시대. '전염'과 '재난'의 이미지를 각자의 역량으로 충실하게 녹여냈다.
박서련 작가의 <두>는 오래 품고싶은 이야기였다. 박서련. 세글자만 보고 냅다 샀는데, 작가진도 화자도 전부 여성이었다.
각 작품이 지닌 개성이 강하지만, <쓰지 않을 이야기>가 한데 묶어주는 느낌.
박혜진 평론가의 해설까지 읽고나서 표제작으로 삼은 이유를 깨달았다.
네 단편, 해설까지 버릴 것이 없는 소설집.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평온한 일상에 소리없이 스며들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전염병을 소재로 한, 팬데민 단편선.
<그토록 푸른>, <특별재난지역>, <두> 세 작품을 <쓰지않을 이야기>가 마무리 짓는다.
네 작품 중에서 <두>는 특별하다.
흔히들 상상하는 일반적인 전염병이 아닌, 피해자를 지키기 위한 전염병이기 때문이다.
‘나처럼 되고 싶은게 아니라면 접근하지마.’
피해자들의 몸이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두 연대자가 이들의 몸을 감싸안는 순간 분노와 긴장을 덜게 된다.
이대로 묻히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 전염병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는 민폐의 대상으로 인식되지만,
적어도 <두>에서만큼은 위험을 알리는. 즉, 구조 신호로 인식된다.
이 신호가 일부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 과연 우연일까. 연대는 상대에 대한 공감과 염려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렇다면 재난상황 속의 재난을 그리는 <특별재난지역>은 어떻까.
해당작품은 코로나19가 급격하게 확산되던 시기의 청도를 배경으로 한다.
전염병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을 틈타 디지털 범죄가 고개를 들이민다.
확진자가 나온 지역을 폐쇄하자고 주장하고, 확진자의 동선과 거주지역을 암암리에 공유하며 꼬리표를 붙이고,
한 개인의 신상을 추적해 디지털 범죄 대상자를 물색한다.
더 이상 주변인을 믿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관심의 손길이 건네진다면, 우리는 과연 이를 단순한 호의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재난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폭력과 공포는 결코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다.
<그토록 푸른>은 근무환경 및 처우로 큰 이슈가 되었던 모 기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코로나로 이동이 제한된 틈을 타, 인터넷 사업체들은 호황을 누리고 있다.
일상의 편리함을 누리는 것과 비례해서 택배 노동자, 물류센터 노동자의 노동 강도는 점차 극으로 치닫고 있다.
‘확진자가 나오는 순간 너도 죽고 우리도 죽는’거라고 위협적인 시선을 보내는 업체들.
(실제로 모 기업은 확진자 발생 후 대처로 온갖 눈총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승승장구하는 중이다.)
당연하게도 확진자는 고립과 비난을 피하기 위해 감염사실을 숨긴채로 근무하게 된다.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확진자가 숨진다면 이는 업체의 잘못일까, 그럼에도 숨긴 피해자의 잘못일까.
그리고 그 죽음은 늘 그래왔듯이 순간의 이목을 끌 것이다.
전염은 언제나 더 낮은 곳, 보호받지 못하는 대상에게 향한다. 살아남는 것도 그들의 몫이 아닌 경우가 많다.
때로는 살고자 발버둥 칠수록 깊은 수렁으로 빠져듦을 느낀다.
<쓰지않을 이야기>는 화자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일상과,
군데군데 지워져버린 추억(망각) 그리고 쓰지않을 죽음을 이야기 한다.
쓰인 이야기는 말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고, 또다시 망각을 경험하며 생존하고자 노력할 것이라고.
우리는 수많은 전염의 순간을 지나왔고, 새로운 전염을 통과하는 중이다.
모두들 ‘전염을 이겨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전염이 잊힌’것에 가깝다.
인류는 전염을 이겨낸 적이 없다. 전염에 도전하여 운좋게 살아남았고, 망각하면서 또다른 전염을 마주할 뿐이다.
언제나 죽음보다 생존이 주목받았고, 생존은 승리의 역사로 기록되었다.
이제껏 전염은 ‘병’의 이미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인 현재,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전염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상을 위협하는 공포에 대한 ‘두려움’이다.
신체와 정신 모두를 갉아먹는 전염 앞에서 누군가는 생존하고, 누군가는 채 버텨내지 못하고 세상을 등질 것이다.
인류는 늘 그래왔듯이 망각을 디딤돌 삼아 내일을 향하게 될까. 노트에 남겨질 역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쓰지않을 이야기를 통해 쓰고싶은 역사를 가만히 그려본다. 약자들의 역사가 쓰일 그날을 기다리며...
인상깊은 구절
1. 언젠가 팀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절대 확진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고 했던 말.
물류센터가 폐쇄됐을 때의 피해액은 물론, 회사의 이미지가 추락해 경쟁 업체에 고객을 빼앗길 때 생길 손해까지 따져보면
절대로 확진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고 했던 말. 다시 생각해보니 그 말의 속뜻은 '예방'이 아닌 '침묵'처럼 느껴졌다.
2. 쓰러진 사람의 눈가를 닦아내자 파운데이션이 지워지며 진한 녹색 피부가 드러났다. 명치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었다.
나는 그토록 서글픈, 그토록 참담한 푸른 빛을 본 적이 없었다.
3. 선생님, 안 아파요? 하나도 안 아파. 아니야, 엄청 아파. 선생님도 사실은 잘 모르겠어.
4. 위기를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에 '도전'하며 자연을 이용해온 것이 인류의 역사라고 할 때,
전염병이라는 불가항력은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되며 만들어진 인간의 관성, 즉 도전하고 극복하고 제압하려는 힘을 거스르도록
요구한다는 점에서 인규라 마주한 진정한 위기다. 대규모 전염병 상황에서 인간은 만나고 싶은 욕구,
연결되고 싶은 욕구와 싸워야 한다. 우리는 고립되어야 한다.
5. 전염병이 차별의 기제로 작동할 때 그것은 빨리 치료해야 하는 질환이기보다 들키지 말아야 하는 수치가 된다.
6. 개인이 집단을 온전히 감당하고 있는 왜곡된 구조는 문제의 원인을 개인의 폭로에 맞춘다.
집단은 그 자체로 개인을 은폐하는 폭력의 구조일 수 있다. 집단이라는 합의의 구조가 전염병을 만들고 키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세 번째 폭력이다.
키워드: 팬데믹, 전염, 재난, 폭력, 낙인, 구조 신호, 망각, 생존자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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