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소설 | 모두 너와 이야기 하고 싶어 해 |
종이책 | 은모든 | 민음사 | ★★★★★ |
후기 '네가 들어줬으면 하는 이야기가 있어'
은'모든'과 '모두'.
누군가 들어줬으면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아무렇지 않게 털어놓기에는 사소한 듯, 개인적인 듯 어정쩡한 이야기들.
목 끝까지 차올라 웅얼웅얼 하다가, 적절한 사람을 만나면 봉숭아 씨앗처럼 무심결에 툭, 하고 내뱉게 된다.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조용히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
때로는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갈데 없는 마음에 큰 위안이 된다.
책에선 우울증을 겪은 엄마, 쌍둥이 조카를 키우는 동창,
상견례에서 상처받은 절친 등 각자의 이유를 두고 주인공(경진)을 찾는다.
경진은 소통에 능하지 않은 사람이다.
과외 학생이 뭔가를 의논하려하면 자연스럽게 대화를 단절시키고, 엄마와의 통화는 금새 싸움으로 번지고 만다.
경진이 못되거나 주변에 인색해서가 아니라, 그저 소통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 뿐이다.
그런 경진이 자신에게 이런저런 개인사를 술술 풀어놓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점차 변해간다.
엄마에게 먼저 말을 걸고, 세신사의 이야기에 눈물을 흘리며 손을 맞잡고, 책을 덮고는 과외 학생의 눈을 마주본다.
(개인적으로 세신사의 이야기를 듣고, 세월호가 연상되더라...)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된다. ‘공감’하는 사람이 된다. 타인을 ‘이해’하는 사람이 된다.
한 뼘 두 뼘 둘레가 늘어나는 향교의 은행나무처럼, 경진의 세계도 한뼘 두뼘 넓어진다.
타인과의 소통이 단절된 요즘같은 세상에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가.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네 이야기를 듣는' 것.
그렇게 우리는 서로 연결되고 관계를 맺는다.
책을 읽고나면 다들 자신만의 경진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혹은 자신이 경진이거나, 둘다이거나.
메마른 흙에 물을 뿌리고, 초록빛 싹이 하나 둘 피어나는 듯한 초록초록한 작품.
모.너.해. 소곤소곤 들려오는 너와 나의 이야기.
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듣고)싶어 해. 참 산뜻한 산책이었다.
인상깊은 구절
1. 5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약사는 인간은 누구나 언젠가 죽는다는 말을 가장 싫어한다고 했다.
'언젠가'라는 말은 그 말처럼 막연할 때만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구체화된 상황에 놓인
사람에게는 더 이상 '언젠가'라는 말이 의미가 없지 않겠느냐며 경진의 동의를 구했다.
2. 경진은 믹스 커피를 버릇처럼 마시며 위염과 역류성 식도염으로 고생하던 엄마의 변화가 반가우면서도
어떨떨했다. 공들여 골라 놓고 수십 년 동안 잊고 있었던 잔을 꺼내어 쓰다 보니 그에 걸맞은 새로운 취향과 여유까지
거머쥐게 되기라도 한 것일까. 살면서 한 잔의 커피를 통해 이토록 비현실적인 순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싶었고,
언니가 발굴해 낸 찻잔이 알라딘의 요술 램프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3. 다들 그러더라고. 눈치 보여 못 할 게 뭐가 있냐고 말이야. 내키면 그냥 무조건 하래. 지금도 못 하는 일은 내년
내후년에는 더 못 한다면서. 게다가 우리도 관광지 가까이 사니까 좀 좋으냐고, 민망하면 남들처럼 관광 온
사람인 척하면 된다는 거야.
4.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선생님한테 한번 말해 봐. 천천히 다 들어 줄게. 오늘 시간도 한 시간 더 있잖아."
해미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경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라졌던 사흘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에 앞서 무엇이 잊히지 않는 기억이 되어 이 아이를 괴롭히고 있을까. 경진은 섣불리 짐작하는 것을
멈추고 눈물이 맺힌 해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키워드: 전주, 향교, 은행나무, 커피, 이야기,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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