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소설 | 천 개의 파랑 | 종이책 | 천선란 | 허블 | ★★★★★ |
후기 '너와 내가 함께 호흡하는 세상을 그리며...'
끝나는게 아쉬워 한 페이지를 아주 오랜시간 붙잡고 공들여 꼭꼭 씹어먹었다.
내 시선이 미처 닿지 못(안)한 사각지대로 나를 기꺼이 이끌어주는 소설.
"문명이 계단을 없앨 수 없다면 계단을 오르는 바퀴를 만들면 되잖아요. 기술은 그러기 위해 발전하는 거니까요.
나약한 자를 보조하는게 아니라, 이미 강한 사람을 더 강하게 만든다고 생각해요."
보조가 아닌 함께하는 세상.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닌, 함께 만들어가는 세상.
콜리, 투데이, 연재, 은혜, 보경, 지수, 복희, 민주, 다영이 각자의 길을 찾고 그 속에서 연대하며,
서로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다정함을 보여준다.
서로를 어루만지는 다정한 물결. 때로는 누군가의 물결에 휩쓸리기도 하고, 때로는 한데 모여 큰 물결과 파동을 만든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 "행복"이다.
미처 갖지 못했던, 잃어버린, 놓쳐버린 그것. 그리움을 이기고, 멈춰있던 시간을 흐르게 하는 그것.
경주마 투데이의 행복을 위해 모였던 이들은 얽히고(연대) 엮이는(대화) 과정에서 서로 호흡하기 시작했다.
투데이의 느린 달리기와 함께. 어긋난 시간들이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간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콜리가 있다.
잘못 심어진 칩이 우연히 만들어낸 존재. 말과 호흡하는 기수로봇.
"떨림"으로 행복을 감지하는 휴머노이드. 천 개의 단어로 천 개보다 큰 행복을 만든 (브로)콜리.
콜리의 순수한 호기심과 진실된 마음이 보여준 분홍보라, 파랑노랑, 초록빨강한 파랑(blue)과
행복의 파랑(wave)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콜리를 만나고 난 후 '인간같은 로봇, 로봇같은 인간'이라는 표현을 자제하기로 했다.
눈부신 하늘을 바라보는 콜리의 눈에선 파란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다. 천 개의 파랑을 담은 눈부신 눈물.
현대사회의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다름아닌 너와 나의 "호흡"임을 알려준 따스하고 다정하고 포근한 소설.
작가의 시선 끝에 우리가 놓아버린 손이 멈춰 서있다.
다수의 편의를 지키고자 기꺼이 놓아버린 손들.
전동 휠체어에 관한 내용을 찾아보면서 다수의 이기심에 또 한번 놀라고 말았다.
인도로 다닐 수 없는 이들에게 "도로로 나오면 위험"하다며 안전교육만 하는 국가.
"그러게 왜 도로로 나오고 집밖으로 나와서 사고를 당하냐"며 되려 큰소리를 치는 사람들.
더 나은 해결책이 존재함에도 시도할 생각조차 없는 국가. 차별과 편견으로 똘똘 뭉친 날이 선 시선들.
천선란 작가의 목소리는 불가능한 미래를 말하지 않는다. 아주 작은 시도로 바꿔나갈 수 있는 현재를 말한다.
허황된 상상이 아닌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한다는 점에서, <천개의 파랑>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이야말로 '지키지 못한 어제'에서 벗어나 '지킬 수 있는 내일'을 향해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호흡을 맞추어야 할 때가 아닐까.
+)그야말로 콜며들었다...
나쁜사람의 목소리는 철저히 배제되어있는 점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고 합니다. 천선란 작가님 사랑하지 않는 법 나는 몰라...
+) 투데이의 느린 달리기 연습과, 은혜. 연재. 보경의 멈춰있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는 교차점. 모두가 비로소 호흡하는 순간.
연재가 지수와 콜리를 만나 변해가는 과정이 감동적이고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하나씩 알아가는 거야...
인상깊은 구절
1. "약속" 콜리는 약속이라는 단어를 가볍게 읊었다. 약속은 참 편리했다. 약속 한 번으로 많은 소리가 낭비되지 않았다.
말의 목덜미를 쓸어주는 것, 고삐를 당기는 것, 등자로 말허리를 차는 것, 적절히 구호를 외치는 것만으로도
말과 대화 한 번 나누지 않고 주로를 달릴 수 있었다.
2. 하늘은 매일, 매 시간마다 색과 모양이 바뀌었다. 하늘은 파란색이었지만 가끔 보라색이나 분홍색, 노란색, 회색이
섞이기도 했다. 그렇게 섞인 색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라 콜리는 '파랑분홍'이나 '회색노랑'으로 단어를 합쳐서 불렀다.
세상에는 단어가 천 개의 천 배 정도 더 필요해 보였다. 동시에 걱정이 들었다. 혹시 세상에 이미 그만큼의 단어가 있는데
자신이 모르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 단어들은 어디에서 알 수 있을까.
3. 투데이가 행복해한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콜리는 투데이가 행복하다면 자신도 행복한 거라고 정의 내렸다.
갈기가 물처럼 흐르고, 기쁨의 떨림이 몸을 감쌌다. 투데이의 빠른 박동을 콜리는 오롯이 전달받고 있었다.
투데이, 행복한가요? 그럼 저도 행복한 거에요.
4. 콜리는 자신의 최후를 생각해도 이렇다 할 감정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되도록 오랫동안 하늘만 보고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아쉬움과 형태가 같다고는 깨닫지 못한 채로 말이다.
5. 때때로 어떤 일들은, 만연해질수록 법이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그 일에서 손을 놓아버리고는 했다.
6. 오빠가 했던 말 중에 아직도 기억나는 게 있어요. 앱이 업데이트 되는 속도가 동물의 멸종 속도와 같대요.
제가 앱 하나를 업데이트 할 때마다 지구상의 어떤 동물이 완전히 멸종한다는 괴상한 말이에요.
7. 지독히도 인간 중심적인 이 행성에서 동물들은 변화의 희생양일 뿐이었다. 보호받지 못하면 살 수 없도록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자유를 주다니. 복희는 그것 역시도 착해지고자 하는 인간의 이기심이라 여겼다.
8. 그리움이 밀고 들어오는 순간을 에견할 수 있다면 오래도록 그 순간을 만끽할 수 있게 준비라도 할 텐데,
친절하지 못했던 이별처럼 그리움도 불친절하게 찾아왔다.
9. "그리움이 어떤 건지 설명을 부탁해도 될까요?"
"기억을 하나씩 포기하는 거야. (생략) 문득문득 생각나지만 그때마다 절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거야.
그래서 마음에 가지고 있는 덩어리를 하나씩 떼어내는 거지. 다 사라질 때까지."
"마음을 떼어낸다는 게 가능한가요? 그러다 죽어요."
"그리운 시절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에서 행복함을 느끼는 거야. (생략) 행복한 순간만이 유일하게 그리움을 이겨."
10. 시간이 서로 다르게 흘러간다는 이론에 대해서는 연재가 말해줬어요.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것이라고요. 제가 투데이와 함게 달릴 때 느꼈던 시간이 접힌 듯한 현상은 실제라고요.
생명은 각자마다 삶의 시간이 다른 것 같아요.
11. 저는 팀이라는 게 그렇다고 생각해요. 물론 투데이는 자신의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저는 감정이 없지만
100마리의 말이 바다에 빠졌을 때 가장 먼저 저는 투데이를 구할 거예요. 바다에 빠진 모든 말을 결국에는 구하겠지만
가장 먼저 구하는 거요. 그건 아낀다는 뜻이래요.
12. 아쉽다. 아쉬움이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은 지 오래돼서 완전히 잊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쉬움에는 약간의 설움이 섞여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아쉽다는 단어를 꺼내면서, 아쉬움에 면역되지 않은 마음이
설움에 정복당하는 듯했다.
13. "당신은 저를 인간처럼 대해주시네요. (생략) 그렇지만 제가 인간이 되고 싶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이 저를
인간처럼 대할 때 기쁜 이유는 당신이 저를 옆에 실재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저는 인간 옆에 오래
있는 기계이고 싶어요. (생략) 저는 기계니까요."
14. 천 개의 단어만으로 이루어진 짧은 삶을 살았지만 처음 세상을 바라보며 단어를 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천개의 단어는 모두 하늘 같은 느낌이었다. 좌절이나 시련, 슬픔, 당신도 알고 있는 모든 단어들이
전부 다 천 개의 파랑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파랑파랑하고 눈부신 하늘이었다.
키워드: 기수로봇, C-27, (브로)콜리, 경마, 경주마, 투데이, 하늘, 파랑, 행복, 그리움, 호흡
꼬리(연결고리): 어떤 물질의 사랑
-천선란 작가의 소설집. 천선란이 말하는 사랑은 어딘가 슬프면서도 찬란하게 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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