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소설 | 나의 할머니에게 | 종이책 | 윤성희, 백수린 강화길, 손보미 최은미, 손원평 |
다산책방 | ★★★★☆ |
후기 '육체는 늙지만 감정은 늙지 않는다'
표지의 후가공이 마음을 움직였다.
유광코팅 덕분인지 유독 가운데 풍경이 선명하게 보인다.
노년의 인생에 대한 막연했던 이미지가 또렷해지는 순간.
나는 왜 그동안 할머니가 느꼈을 온갖 감정들을 외면하며 지냈을까.
<나의 할머니에게>는 여러 이야기가 담겨있다.
기쁨, 슬픔, 분노, 애정, 수치 등 누구나 느끼는 흔한 감정을 느끼는 할머니들의 이야기.
“하지만 할머니는 이제 알았다. 퇴화하는 것은 육체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왜 늙으면 감정이 없어진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했을까.
나 또한 늙은 사람이 연애감정을 느낀다거나 누군가와 사랑하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찝찝했다.
흔히 말하는 “늙어서 주책이다.”처럼. (물론 그정도로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있던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사회가 노인들에게 부여한 이미지를 의심없이 따르고 있었나보다.
여섯작가들은 그 인식을 부수려는 듯, 할머니의 모습을 솔직하게 가감없이 보여준다.
한 후기에서 ‘난해한 소설집이다.’라고 했는데, 그 말이 충분히 이해가 갈 정도였다.
‘할머니’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포근함이 아닌, 길 어디에서나 만날 법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애써 외면했던 모습을 확인하는 일은 낯설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마음을 조금만 편히 먹으면 이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들려온다.
여섯작품 모두 인상적이었지만, 특히 백수린 작가의 <흑설탕 캔디>, 손보미작가의 <위대한 유산>,
손원평작가의 <아리아드네 정원> 세 작품이 마음에 들었다.
<흑설탕 캔디>는 모든 것을 손주들에게 양보하던 할머니가 딱 하나 온전한 자신의 것으로 간직해 온
‘두근거림’이라는 감정을 그리고 있다.
<위대한 유산>은 냉정한 할머니로 인해 갖은 수모를 겪었던 가정부 아주머니의 조용한 분노를 그리고 있다.
<아리아드네 정원>은 고령화 사회의 어느 한 시점. 유닛에서 살아가는 노인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다른 작품들도 그랬지만, 아리아드네 속 노인들은 유난히 입체적이었다.
아리아드네 정원은 여러 사회문제가 야기할 미래상황을 그려내고 있어서 더 집중해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모든 이야기는 거울 속 나 자신을 마주하게 한다.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설레하고, 때로는 슬퍼하는.
언젠가는 내가 될, 하지만 ‘노인’이라는 이유로 쉽게 드러낼 수 없는 그 감정들.
<나의 할머니에게>는 육체가 늙는다해서 감정마저 늙는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던 소설집이다.
절대적으로 외로운 노인은 없었고, 또 절대적으로 포근한 인성을 지닌 노인도 없었다.
육체의 노화와 함께 이름을 잃은 그들. '할머니' 나와 똑 닮은 그들을 기꺼이 마주해본다.
인상깊은 구절
1. 극장에서 나와 홀로 거리를 걷다자 처마 밑에서 소나기가 그치길 기다리며 맡았던, 어느 가게의 생선구이 냄새.
뺨에 닿았던 습기의 감촉과 와아아 떨어지던 빗소리. 살아 있다는 감각과 동시에 찾아오던 이미 너무 늙어버린 것 같다는 느낌.
아,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기억들은 어째서 이렇게나 생생할까?
2. 할머니처럼 검버섯이 피어 있지만 한국 남자의 것과 달리 은빛 털로 뒤덮여 있는 그의 팔을 바라보는데,
브뤼니에 씨를 할머니는 영원히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이, 그 역시 할머니에 대해서 끝내 알지 못하리라는
사실이 실감 났고 그러자 놀랍게도 가슴 안쪽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3. 오래전, 스스로 너무 늙었다고 느꼈지만 사실은 아직 새파랗게 젊던 시절에 할머니는 늙는다는 게
몸과 마음이 같은 속도로 퇴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몸이 굳는 속도에 따라 욕망이나 갈망도 퇴화하는.
하지만 할머니는 이제 알았다. 퇴화하는 것은 육체뿐이라는 사실을.
4. 그녀는 자신의 기억이 마음속의 어떤 길을 따라갈건지, 그 길로 통행 허가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5. 늙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몰라. 변한다는 걸 빼곤 확실한 게 없으니까. 너희가 본 할머니도 마찬가지야.
이름은 지윤이지만 누구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지. 지윤인 가진 게 참 많았었어.
그런데 이제는 그것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단다. 자신도 모르게 사라져버린 이름처럼 말이야.
키워드: 할머니, 노년의 삶, 고령화 사회, 사회문제
꼬리(연결고리): 파과
-감정을 절제하며 살아온 조각이 뒤늦게 느껴보는 온갖 감정에 낯설어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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