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소설 | 280일 | 전자책 | 전혜진 | 구픽 | ★★★★★ |
후기 '임신은 결코 신성하지 않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면서 겨우겨우 완독했다.
소설이 아닌 현실 그 자체다.
편의상 1부를 임신, 2부를 출산으로 나눠보면 특히 1부 때문에 이 책을 다 못 읽을 것이라 생각했다.
주인공들이 처한 현실이나 답없는 남편들을 보면서 울화통이 치밀었기 때문이다.
280일에는 총 네명의 주인공이 있다. 은주, 선경, 재희, 지원.
각 주인공이 임신과 출산으로 겪는 일화들과 감정들을 다루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아홉번의 시도 끝에 겨우 임신에 성공한 선경.
마흔이라는 나이임에도 임신에 성공한 은주.
아이를 원하는 남편을 위해 임신을 선택한 재희.
사소한 실수로 계획에 없던 임신을 한 지원.
모두 번듯한 직장이 있었고, 든든한 남편도 있었다.
하지만 이 직장이라는 것이, 남편이라는 것이 임신을 하니 손바닥 뒤집듯 태도가 바뀌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타국으로 발령을 하거나, 인사이동이 취소되거나 하는 등의 현실적인 이야기들 말이다.
겨우 쌓아온 커리어를 잃게되는 것도 분통나는 일인데, 한술 더 떠 공감능력 떨어지는 남편들이 또 가관이었다.
'임신이라고 하니 다들 축하주는데, 왜 그렇게 과민반응인지 모르겠어' 라거나
'회사를 관두다니. 그럼 돈은 어떡해?' 라거나.
가만있으면 중간이라도 갈텐데,꼭 되도 않는 말이나 생각들을 하면서 속을 긁어놓는다.
아내를 배려하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는 재희나 은주의 남편은 굳이 따지자면 판타지에 가까운 쪽이고,
선경과 지원의 남편같은 경우가 훨씬 많을거라 생각한다.
엄연히 임신은 여자의 영역인데, 정작 유세는 남편이나 회사사람들이부리고 있으니 웃길 노릇이다.
포궁이 없으면 말을 말아야 한다.
인구정책 실시한다고 선별적 출산을 시키더니, 이제는 애가 없다고 출산장려를 하고 앉았으니.
국가부터 여성을 인격체로 취급하지 않고 애낳는 기계로 보고있는데, 남자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국가차원의 문제이다.
폴란드같은 애기박스는 못만들더라도 여성들에게 씌워지는 사회적 프레임이라도 벗겨주어야 하는 것이다.
임신지도 같은 걸 만들어대는 멍청한 행동들 빼고 말이다.
임신을 숭고한 것으로만 그리지 말고 임신 후 여성의 변화, 출산 후 변화를 하나부터 열까지교육해야 옳다.
'엄마는 위대하고 아름답다.' 이딴 소리들을 하면서 임신을 신성시 하니까
더 쉬쉬 하면서 그 후의 변화들을 숨기게 되는 것 아닌가.
엄마가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그걸 강요하고 있다. 하지만 남자들은 그걸 모른다.
임신은 여자 혼자 하는 것이 아닌데 여성에게만 짊어지게 하는 것이 너무 많다.
잃는 것도 여성이 더 많음에도.
그렇게 얕보는 여성의 뱃속에서 나온것은 까맣게 잊은 듯이 사회적 지위와 명예는 남성들만 차지한다.
'최초의 여성'이란 타이틀을 자랑스럽게 붙일게 아니라, 최초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생각해야한다.
곰곰히 생각해봐도 임신과 출산이 여성에게 득 될 것이 없다.
거기다 태어난 아이가 여아라면 엄마의 불안감은 가중된다.
안심하고 임신과 출산, 육아를 할 수 있는 사회로 바뀌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인구가 감소할 것이다.
선택적으로 출산을 하던 사회를 지나 일단은 낳아보라는 사회에 이르기까지
너무 많은 여아가 낙태당했고, 너무 많은 여성이 울었다.
참고지내다 이제야 목소리 좀 내보겠다는데, 막아서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몸은 내 것이고 내 포궁 또한 내 것이니까.
인상깊은 구절
1. 살면서 공연히 시비를 걸어대는 남성 노인들을 한 번도 못 본 건 아니지만,
백주대낮에 정말 아무 짓도 안하는데 주먹까지 들이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게 그냥 미친 개 같은 인간이라 그러는 게 아니다.
그냥 젊은 여자보다, 임신한 젊은 여자가 더 약자라서 그럴 수 있는 거다.
내가 한 대 치면 네 새끼는 그냥 가는 거야, 그러니까 나한테 슬슬 기어야지. 거의 그런 메시지를 보여 준거였다.
2. "애도 못 낳는 게 뭐가 자랑이라고 유세야, 유세는!"
죽여버리고 싶었다.
"이래서 여자들은 안 돼. 회사에 충성은 안 하고 자기 일만 바빠서는!"
회사에 충성을 안 했다고?
회사에 충성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선경은 두 아이의 엄마였을 거다.
3. 한번은 듣다못해 물어본 적이 있다.
그렇게 남자애만 낳겠다고들 하면, 얘들이 자라면 결혼은 누구랑 하냐고.
그때 친척들은 계집애가 별 시답잖은 소리를 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 집안 자손들은 다들 똑똑하고 잘났으니, 아무리 남자가 넘쳐나는 세상이라도 여자가 줄을 설 거라고.
그래서 그날에야 알았지. 이 집 자손이라는 말에 딸은 들어있지 않다는 것도.
4. "태아가 여자애라고 낙태하는 건 '가족 계획'인데, 정작 강간을 당하거나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한 여자들은
낙태 제때 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게 말이 돼요? 아이는 지우고, 강간범은 감옥에 처넣어야 하는 거잖아요.
근데 심지어는 우리 어릴 때는, 판사가 강간범과 피해자를 결혼시킨 게 미담이고 그랬잖아요. 미쳤어."
5. 모두가, 아이가 안 태어난다고, 정말 큰일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어째서 아이를 낳기로 한 여자들은 이렇게까지 모욕과 멸시를 감당해야 하는 걸까.
아이를 낳는다고 인생이 끝나는 게 아닌데.
"무슨 선녀 날개옷도 아니고..."
아이를 낳게 하고, 그걸 핑계로 일자리를 빼앗고, 혼자 살아갈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고 온 사회가 공모하는 것 같았다.
6. 정말 이런 일들이 일어날 거라고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지 않아 큰일이라고. 아이가 태어나는 게 행복이라고 말할 뿐.
하다못해 몸이 아플 때에도, 임신 기간 내내 현대 의학에 외면당한 것처럼 약도, 파스 한 장도 마음 놓고 쓸 수 없다는 것을.
아이가 희망이라고 말하면서. 그 아이를 임신한 여자는사회로부터 반쪽짜리 취급을 당하며 멸시 당한다는 것을.
몸이 무겁고 지켜야 할 존재가 있는 약자가 되어 버려, 손쉽게 공격 대상이 된다는 것을.
사족
읽으면서 치가 떨렸다.
선경과 비교한답시고 아내의 유산을 떠벌이던 부장놈이나, 술마시고 폭언 쏘아대던 늙은이나.
이 모든게 현실에 존재하는 유형이라는게 분통터지는 일이다.
작가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글일텐데, 이렇게 쓰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이 있으셨을지 생각하면 눈물난다.
키워드 : 임신, 출산, 육아, 280일, 결혼, 경력단절
꼬리(연결고리) : 사건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되었을때 여성이 할 수 있는 하나의 선택지 낙태. 침묵을 깬 작가의 고백을 들어보자.
'2020년 독서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21. 펀 홈-20.04.01~04.02 (0) | 2020.04.07 |
---|---|
20. 파워-20.03.27~03.28 (0) | 2020.04.07 |
18. 덤플링-20.03.25~03.26 (0) | 2020.04.07 |
17.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20.03.23~03.24 (0) | 2020.04.07 |
16. 을들의 당나귀 귀-20.03.21~03.22 (0) | 2020.04.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