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소설 | 일의 기쁨과 슬픔 | 종이책 | 장류진 | 창비 | ★★★★★ |
후기: 이것은 픽션을 가장한 논픽션이다.
그 유명한 <일의 기쁨과 슬픔>을 드디어 읽었다.
한창 김모작가 이슈로 떠들썩할 때 받은 책이라 도저히 양심이 허락하질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이제야 읽게되었다.
'이왕 늦어진 김에 어디든 출근하게 되면 읽자' 했더니 결국 11월이 되었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솔직함으로 무장한, 냉정하고도 따스한 글이었다.
들숨에 한숨을 삼키고, 날숨에 웃음을 뱉으며 즐겁게 읽었다.
이 책은 절대 픽션일 수가 없다. 여기에 바로 직장인의 애환이 생생하게 구현되어 있다구요.
각각의 등장인물이 나와 똑 닮은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일의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고 있었다.
일에 치이는 모습에 울먹이고 성별간 임금격차에 분노하다가도 웃게되는 것은,
숨가쁜 일상 속에 잔잔하게 오고가는 정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를 어지럽히는 일이 가득할 때에도 때때로 마주하는 사소한 것들이 숨통을 터준다.
"그때까지 언니가, 그때까지 내가 회사에 있을 수 있을까.", "Do not bend(Photo inside)"
세상 물정 모르는 빛나언니를 염려하는 마음은 곧 나를 위한 마음이 되고,
행여나 편지가 구겨질새라 두꺼운 종이를 덧대는 쭈글쭈글한 손은 지친 내 마음을 어루만진다.
사별한 옛동료에게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며 김칫국을 사발로 들이키는 남정네가 등장하는 와중에도
이런 다정한 마음들이 나를 웃고 울게 만들었다.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는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물론 직장인을 가장 환하게 웃게 만드는 것은 <일의 기쁨과 슬픔> 속 알림같은 입금문자일테지만.
일 시작할 때까지 아껴뒀다 읽은 것이 전혀아쉽지 않은, 좋은 책이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스트레스가 쌓이거나, 답지않은 갑질에 지쳐있을 때 문득 떠올리면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나올 것만 같다.
선물받은 다정한 마음 온전히 와닿았습니다.
+) 독서의 기쁨과 슬픔. 창비책 얼마만인지
감당하기 힘들만큼 많은 포인트를 보며 한참동안 울었을 거북이알을 생각한다.
직장인에게 월급이 어떤 존재인지 알면서 그래.. 역시 가진 사람들이 더한다는 말이 딱이다.
구질구질함의 끝판왕 회장놈 같으니라고. 격하게 분노하다가도 '다소 낮은' 등급의 냉장고 모터소리를 상상해본다. 웅-웅-
인상깊은 구절
1.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중략)
칠억짜리 아파트를 받았다면 칠억원어치의 김장, 설거지, 전 부치기, 그밖의 종종거림을 평생 갖다바쳐야 한다는 거.
디즈니 공주님 같은 찰랑찰랑 긴 머리로 대가없는 호의를 받으면 사람들은 그만큼 맡겨놓은 거라도 있는 빚쟁이들처럼
호시탐탐 노리다가 뭐라도 트집 잡아 깎아내린다는 거. 그걸 빛나 언니한테 알려주려고 이러는 거라고, 나는.
2. 십년 뒤에 우리 더욱 성장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요. 나는 혼자 십년 뒤,라고 조용히 읊조렸다. 너무나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십년 뒤, 그때까지 언니가 회사에 있을 수 있을까. 그때까지 나는 회사에 있을 수 있을까.
3. 카이스트, 레고, 총무. 그 어느 하나도 사교적으로 들리지 않는데. 총무가 아니라 회장이라면 또 몰라.
내성적인 개발자는 대화할 때 자기 신발을 보고 외향적인 개발자는 상대방의 신발을 본다더니.
이 세계에서 레고 동호회란 대체 뭐란 말인가. 크레이지 파티광쯤 되는 건가.
4. "코드를 좀 멀리서 보면 어때요?"
케빈이 말없이 나를 올려다봤다.
"자기가 짠 코드랑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덧붙였다.
"버그는, 그냥 버그죠. 버그가 케빈을 갉아먹는 거 아니니까."
5. 저는 곡이 한곡만 덜렁 있으면 뭐랄까요, 이를테면 뮤지컬을 보는데 인터미션부터 들어가는 기분 같아서요.
그러니까 소설책을 두번째 장만 찢어서 가지는 사람은 없잖아요.
6. 우리 부부는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했다. 나에게 아이는 마치 그랜드 피아노와 같은 것이었다.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아주 고귀한 소리가 날 것이다. 그 소리를 한번 들어보면 특유의 아름다움에 매혹될 것이다. 너무 매혹된 나머지 그 소리를
알기 이전의 내가 가엾다는 착각까지 하게 될지 모른다. 당연히,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임감 있는 어른,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그걸 놓을 충분한 공간이 주어져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중략)
이십평대 아파트에는 그랜드 피아노를 들이지 않는다. 그것이 현명한 우리 부부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7. 웹사이트 주소는 바꾸면 그만이었고 금칙어 사이사이에는 특수문자를 끼워 넣어 교묘하게 피했다.
개발자들도 최선을 다해 스팸 방지 로직을 만들었고, 스패머도 최선을 다해 글을 올렸고, 여자도 최선을 다해 글을 지웠고,
업주들도 '최선을 다해 모시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쪽과 저쪽이 모두 최선을 다하고 있었으므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8. 연봉게약서에 서명하던 그 순간, 씁쓸한 감정이 들 것 같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는 정말이지, 진심으로, 기뻤다.
방송국이고 피디고 뭐고 지긋지긋했다. 대신 4대 보험이 어쩌고 하는 말들과 상여금, 특근수당, 연차와 실비보험 같은 단어들이
그렇게나 따뜻하고 푹신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수습 기간이 끝나고 정직원이 되면서 회사에서 가족 의료비도 지원해주었다.
아빠는 그 돈으로 수술할 수 있었다.
키워드: 일, 월급, 회사, 출근, 직장인, 판교, 청첩장, 공항, 냉장고, 후쿠오카
꼬리(연결고리): 새벽의 방문자들(다산책방 테마집)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예전에 읽은 적이 있는, <새벽의 방문자>와 재회하다. 다시 읽어도 걸작이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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