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0년 독서기록

84. 숫자가 된 사람들-20.06.02~06.04

by 독서의 흔적 2020. 6. 4.

사회/인권문제 숫자가 된 사람들 전자책 형제복지원
구술프로젝트
오월의 봄 ★★★★★

 

후기 '존재했으나 존재하지 않았던 그들의 목소리'

어느날의 그알을 기억한다. 사방이 술렁였다. '저런 일이 실화라고?'

'한국의 아우슈비츠' 믿지 못할 일들이 국가의 묵인아래 자행되었다.

생존자들은 형제복지원 당시 부여받은 번호를 잊지못한다. 존재했으나 존재하지 않았던 그들이었다.

'왜, 어떻게 아무도 모를 수가 있었을까.' 란 생각에 손이 부들거렸다. 한숨이 나왔다.

바로 앞은 ㅂ병원이 있었고, 주민들을 지척에 두고 있었는데, 정말로 아무도 몰랐단 말인가.

아니다. 다들 알고 있었다.

그저 '저들이 사회를 망치니 국가가 관리해야 한다.'는 말에 다들 방관자가 된 것이었다.

'박인근'의 사업은 순조로웠다. 모두의 침묵 아래 형제복지원은 점점 커져갔다.

그는 내무부훈령 제410호를 등에 업고 승승장구했다.

'부랑인'을 위한 시설은 더 이상 부랑인의 것이 아니었다.

부랑인이라는 옷이 강제로 씌워진 일반시민으로 가득했다.

수용인원이 늘어갈 수록 국가 지원금의 규모가 커졌다.

수용인원이 늘어갈 수록 경찰과 공무원들의 승진이 빨라졌다.

당시 부랑인을 형제복지원에 인계하면 근무점수에 5점이 추가되었다고 한다.

박인근은 국가지원금을 위해, 경찰과 공무원은 승진을 위해, 앞다투어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을 납치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일반주택과 병원을 목전에 둔, 국가가 용인한 거대한 감옥이 완성되었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공식적으로 알려졌을때, 국가와 가해자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전국이 날 서 있었다.

각종 사회운동이 더 커질까 두려웠던 전두환은 '형제복지원 사건'을 서둘러 덮어버렸다.

그리고 다음해 88올림픽은 성공적으로 개최되었다.

형제복지원 운영자 '박인근'.

그를 통해 온갖 혜택을 얻은 자들은 앞다투어 성명서를 냈고, 그를 보호하려 나섰다.

특히 온갖 사회복지 단체들이 박인근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고 했다.

형제복지원같은 시설이 한 두개가 아니었기에, 행여나 본인들까지 처벌받을까 두려웠으리라.

결국 특수감금죄는 지워진 채 고작 징역 2년 6개월이란 형량에 그치고야 말았다.

그마저도 재판과정에 2년 6개월이 소요되었기에, 실질적인 징역살이는 2주에 불과했다고 한다.

 

고등법원의 유죄판결과 대법원의 무죄판결이 다투고있을 때, 형제복지원은 여러번 탈바꿈을 했다.

피해자 단체의 조사에 의하면 당시 그의 재산은 천억원에 달했다.

형제복지원의 수용자들이 각종 노역과 폭력에 시달리고 있을 때, 박인근의 자녀들은 해외유학을 갔다.

형제복지원의 수용자들이 썩은 음식들을 먹고 있을 때, 국가는 박인근에게 훈장을 부여했다.

형제복지원의 수용자들이 온 몸에 이가 득실거리고 있을 때, 그의 아내는 온갖 치장을 하고 형제복지원을 오갔다.

형제복지원이 실로암의 집으로 탈바꿈해 또다른 형제복지원이 되었을 때, 박인근의 손에는 온갖 지원금이 쥐어졌다.

그리고 국가와 부산시, 박인근이 서로간에 책임을 미루고 있을때, 생존자들은 소리없이 죽어갔다.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기에 '꿈'을 꾸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이들은, 후유증에 시달리다 하나 둘 죽음을 택했다.

살아남은 이들도 저마다 상처를 품은채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모르는 것일까, 모른척 하는 것일까.

1동의 건물이 18동으로 늘어나는 동안, 그것이 정말 부랑인을 위한 시설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경찰이 탈출한 사람들을 박인근의 손에 넘기고 있을때, 저들이 정말 국가에 해악인 존재라고 믿었던 것일까.

그리고 박인근은, 어떻게 그 모든 돈을 손에 편히 쥐고있을 수 있었을까.

형제복지원을 두고 14권에 달하는 자서전을 쓸 동안, 단 한 순간도 반성하지 않았을까. (종이 아깝게 왜 그랬는지.)

"아버지의 인권은 어딨느냐" 고 외치는 그의 아들에게 '인권'이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이름만 다를 뿐 형제복지원을 그대로 복사한듯한 각종 복지시설들을 국가는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가.

 

책을 읽고나서 한숨을 쉬고있었다. 엄마는 "그 힘든 이야기를 왜 읽느냐."고 했다.

"국회의원 되려고(절대 아니지만)"라고 답했다. 그러게, 나는 왜 읽고 있을까.

나 한명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다해서 당장 사회가 바뀔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들이 존재했음을 기억할 수 있으니까.

내가 '우연히' 살아남았음을 알게되었으니까. 1987년까지 복지원이 존재했고, 수많은 형태의 형제복지원이 건재함을 안 순간,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은 순전히 우연임을 알게되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일들은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인 것이다.

우리가 '운이 좋아서' 수용되지 않았거나, 그들이 '운이 나빠서' 수용된 것이 아니다.

그저 '우연히' 그곳을 걷고 있었고, '우연히' 그곳을 걷지 않았기에 서로의 길이 갈렸을 뿐이다.

그러니. 형제복지원 사건은 '그들'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이다.

 

지난 5월 20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하 과거사법)' 개정안이 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를

통과했다고 한다.(출처 오마이뉴스) 이제야 진실을 규명하고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문대통령은 당시 변호사회 인권위원으로 참여했지만, 진실을 규명할 수없었기에 형제복지원이 큰 짐으로 남았었다고 한다.

부디 이들이 최후의 생존자가 되기전에 모든 진실이 규명되고, 처벌받아 마땅한 이들은 그에 합당한 벌을 받길 바란다.

그리고 국가는 이 모든 일을 묵인해온 책임을 져야한다. 다시는 이런 형태의 인권유린이 존재해서는 안된다.  

악한 자들이 떵떵거리며 살고있는 이 사회에도 '정의'가 존재함을 확인하고 싶다.

 

인상깊은 구절

1. 글을 읽는 이들이 온 마음을 다해 그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길 바란다. 듣는다는 것은 말하는 사람의 마음에

가닿을 수 있도록 온 정성과 심혈을 기울이는 일이므로. 그리고 각자의 방식으로 응답해주면 좋겠다. 그때 비로소

여기에 실린 '소리'들은 말이 될 수 있다. 이야기가 들려질 때 비로소 말할 권리도 실현된다.

 

2. 시설 수용은 교화와 복지, 그리고 일반(?) 시민을 안전하게 지킨다는 명분 아래 폭력을 품은 채 유유히 맥을 이어간다.

지금은 노숙인, 고아나 장애인으로 표적이 달라졌을 뿐이다. 얼굴을 바꾼 내무부 훈련 410호와 형제복지원은 여전히

호시탐탐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3. 작은 아이의 뒷덜미를 낚아채는 유능한 경찰의 손아귀에 국가가 있었고, 아이를 인계한 후 성실하게 쌓여가는 공무원의

승진 가산점에도 국가가 있었으며, '갱생'을 외치면서 아이들의 월급을 착복하는 사회사업가의 금고 안에도 국가가 있었다.

그리고 사라진 아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묻지 않는 사람들의 태연한 일상 속에도 국가가 있었다.

 

4. 거기서도 형제원이 잘 보였을 텐데, 그 사람들은 왜 한 번도 ;저긴 뭐하는 곳이지?'하고 묻지 않았을까요?

왜 누구 하나 우리한테 관심을 갖기 않았을까요? 그렇게 마을 가까이 있으면서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이 그 오랜시간

무방비 상태로 맞고 죽어갔을까요...

 

5. 인터뷰 말미에 그는 가해자를 응징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들어 괴롭다고 고백했다. 피해자에게 사적 복수를

꿈꾸게 하는 나라는 제대로 된 사회가 아니다. 구성원을 보호할 시스템이 없는 사회이고, 정의가 무너진 사회이기 때문이다.

 

6. 형제복지원이라는 거대한 폭력의 집합소에 던져야 할 수많은 질문은 사라지고 여성에 대한 성폭력 문제만이 화젯거리인 양

입길에 오르내릴 때, 거기서 어떤 폭력이 자라고 있는지 놓친다면 우리는 바로 자신 옆에 새로운 형제복지원을 짓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안녕 님이 다시 형제복지원에 살지 않기를 바란다.

 

7. 그는 정말 형제복지원이라는 명칭을 싫어했다. 형제복지원이라고 부르면 모르는 사람들이 '복지' 공간이라 오해한다며

반드시 형제원이라 불러야 한다고, 그 순한 양반이 정색하고 화를 내곤 했다.

 

8. 그의 생애 첫 페이지는 차갑고 건조한 말이 전부였다. 감정이 배제된 명사로만 쓰여진 서류.

감정만이 아니었다. 이 기록에는 도무지 격이라는 것이 없다. '인수'라는 말을 사람에게 쓰던가? '인수'는 물건이나 권리를

양도할 때 쓰는 말이 아니던거? 이는 사소한 기입실수가 아닐 것이다. 당시 시설이 수용자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가

드러나는 한 단면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9. 역설적이게도 부랑인 시설이었던 형제복지원에는 처음부터 부랑인은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오히려 부랑인이라는 개념은 형제복지원과 같은 시설들의 존립을 위해 철저하게 만들어진 것이며, 당시 그 시설을 채울

누군가들-주로 다양한 사회 약자들-을 포획하기 위해 고안된 잔인한 언어의 그물에 불과했다.

 

10. 대체 이들의 노동력은 다 누구를 위해 쓰였던 것일까? 박인근 개인? 그렇다면 왜 국가는 세금으로 이들의 감금과

강제 노역을 지원했던 것일까? 차마 국가가 한낱 시설장에 불과한 박인근에게 속아 놀아났다거나 기껏 박인근 개인의 치부를

위해 그 거대한 국가 시스템이 운영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답은 자명하다. 이들의 노동력은 결국 국가가 착복한 것이다.

 

11. 통칭 과거사 문제라고 이야기되어지는 국가 폭력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거"라거나 "어쩔 수 없었다"는 투로 마치

과거란 성역이며 국가란 무소불위의 권력체인 양 미적지근하게 체념되곤 한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여전한 현재의 고통이며

, 그 때문에라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최소한 경청의 책임만큼은 주어져야 하는 것이 '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 기본 틀일 것이다.

 

12. 우리 사회에서 어떤사람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는 인간 존엄성이나 인간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권력의 필요' '자본의 필요'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이렇듯 형제복지원이라는

엄청난 폭력에는 한국 사회복지'사업'의 성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부의 축적 수단이 된 사회복지사업,

사유화된 사회복지법인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구가의 공모, 탄탄한 지역적 네트워크는

그들의 폭력을 제어하기보다는 확대재생산한다.

 

13. 형제복지원 사건은 좌우,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닌 인간의 보편적 인궈문제이다. 또한 과거 한때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피해자들의 고통속에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현재형'의 문제다. 국가와 사회가 아직도 절망과 분노의 눈빛을 하고 있는

생존자에게 할 수 있는 일, 그것은 따뜻한 위로와 이들의 거친 손을 잡아주는 것,

그리고 그 첫걸음은 형제 복지원 특별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키워드: 형제복지원, 형제육아원, 실로암의 집, 박인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