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소설 | 유령해마 | 전자책 | 문목하 | 아작 | ★★★★★ |
후기 '온 힘을 다해 사랑을 외치는 작가 문목하'
나에게 사랑은 문목하를 알기 전과 후로 나뉠 것이다.
문목하작가의 <돌이킬 수 있는>을 처음으로 읽었을 때가 기억난다.
'왜겠어요.' 이 한 문장을 읽고 머리가 멍 해지고, 가슴이 저릿했었다.
한동안 내 머릿속을 빙빙 돌아다녔다. 아니, 지금도 돌아다닌다.
사랑에 관련된 이야기만 읽으면 절로 떠오른다. 이렇게까지 후유증에 시달릴 줄은 몰랐다.
그리고 두번째작품 <유령해마> 적어도 내 독서 인생에서는, 이토록 잘 절제한 사랑이야기를 만나본 적이 없다.
응급구조사로 활동하던 비파(해마)는 구조활동을 위해 붕괴한 건물로 파견을 나간다.
발견한 아이 둘을 구조해서 밖으로 나왔더니, 다들 비파의 뒤를 가리킨다.
사람으로 인식하지 못했던 무언가가 그를 쫓아왔던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이미정이,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순간이다.
미정이 이름을 얻고, 보육원에 맡겨질 동안 비파의 관심은 서서히 멀어져간다.
많은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장기간 인공위성으로 파견을 나가게 된 비파.
비파는 실수로 인해 조난을 당하게 되고, 바로 그때 아주 오래전 스쳐지나왔던 미정을 떠올린다.
그렇게 미정은 '너'가 되었다. '너'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며 위기상황을 극복한다.
그때부터 비파의 모든 생각에는 '너'가 함께하게 되었다.
베딘(모든 시스템을 만든)과 싸우는 '너', 지쳐서 합의에 응하는 '너', 개명을 하는 '너',
스발바르에서 기자활동을 하는 '너', 무장한 소년과 마주하게 된 '너', 하지만 총을 거둔 '너'
비파는 그 순간 오랫동안 골칫덩어리였던 개인임무를 해결할 수 있는 존재는 '너'뿐이라는 걸 깨닫는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총을 거눌 수 있는 '너'는 단 하나의 해결책이었다. 아니, 해결책이어야만 했다.
비파는 '너'를 생각하는 행위에서 나아가, '너'를 직접찾아가는 행동에 나서게 된다.
일반적인 해마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과 생각들을 하며 소위 '미쳐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게 조우하게 된 비파와 '너'. 이제는 비파와 '이미정(이은하)'이 되어 서로를 마주한다.
임무를 우선적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비파, 그런 비파를 앞세워 세상에 돌을 던져보려는 은하.
지켜보는 것이 전부였던 해마와 살아가는 것이 전부였던 인간의 만남은 어떤 그림을 완성시키게 될까.
사실, 이 이야기에는 숨겨진 존재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비파의 백업이자 또다른 '나(비파)'이다.
매 순간 '나'를 백업이라 칭하며 자신의 복제쯤으로 여기고 시종일관 미숙한 존재로 취급하던 비파는,
'나'는 자신이며, 자신은 '나'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 순간 개인임무는 '개인'이 아닌 '우리'의 임무가 된다. '미친'해마는 '생각하는' 해마가 된다.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둘이자 하나이며, 하나이자 둘인 존재는 이제 미정의 긴급명령을 해결하고자 한다.
비파와 '나'는 존립이 위협당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미정을 위해, 한발 앞으로 나아간다.
'나'와 '너', '네가'가 난무하는 활자 속 어지러움. (덕분에 내 후기도 어지럽다)
과학적인 내용들에 멈칫(어려웠다는 뜻이다), 각 인물들을 구분하느라 멈칫, 비파가 던지는 물음들을 생각하느라 멈칫.
여러번 멈춰섰고, 끊어읽었다. 금방 읽힐 것 같은데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혀 더 나아갈 수 없었다.
특히 1부... 2부는 수월하게 읽혔다. 이 책만의 스타일에 적응해서 그런 듯하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없어도, 비파의 모든 말이, 시선이, 행동이, 물음이 사랑을 말하고 있다.
나는 이들의 모든 것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고자 하는 바람에, 이책에 일주일이란 시간을 할애했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아무도 모를 것이다.' -29장 中-
아무도 모를 것이다. 해마가 왜 이런 행동을 하게 됐는지.
하지만 적어도 나는 보았다. 존재하지 않던 사람을 향하는 시선이, 그를 존재하는 사람으로 바꾸는 것을.
비파가 '사실은 미정을 이해한 적이 없었다.'고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 실재하는 유형(有形)의 존재가 되는 것을.
단지 '당연히 보이는 것들'을 벗어나, 한 사람만을 향하던 시선을 '잘못됐다'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이 사랑은 비파이기에, 그가 해마이기에 성립 될 수 있었던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나는 갑문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내게 갑문은, 비파가 미정을 위해, 비파를 위해 기꺼이 걸어간 허브로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유령해마가 사실은 하나의 존재라는 것을, 자신이라는 것을, 이 현명한 멍텅구리는 언제쯤 알게 될까.
이토록 짙은 사랑의 흔적을 남긴 비파라면 그리 먼 미래는 아닐 것이다.
서로를 바라보며 활짝 웃을 비파와 '나'와 '너'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작가님, 부디 많이 일하시고 많이 버십시오. 세번째 작품을 기다리며...
인상깊은 구절
1. 해마체가 나를 보호하는 몸이 되고, 숙주들이 내게 연동해 달라붙는다. 빈껍데기였던 나는 내 직업에 맞춰
온몸을 무장한다. 나는 중앙과 행성세계를 잇는 망막이고 손발이며, 영원한 곳간이 된다.
2. 인간이 따뜻하고 건조한 장소와 포만감을 원하듯 해마는 외부의 질문에 답을 내리길 원한다.
우리는 그렇게 만들졌다. 문제를 포기하는 건 자살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답을 찾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겠지만,
중앙에서 사람을 쫓아내면서 그들을 해치지 않으려면 중앙이 첫 문장부터 새로 쓰이지 않는 한 불가능 할 것이다.
3. 자신의 잘못이 아닌 지난 일에 해마가 괴로워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나는 네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나는 분명 완벽하게 일했는데, 어째서 그늘 속에 살던 사람에겐 그게 완벽한 일이 아니었을까?
질문은 오직 바깥에서만 오며 나는 그저 답할 뿐일 존재란 걸 알고 있는데도, 나는 질문하길 그만두지 못했다.
4. 나는 내가 빨리 달릴 가능성조차 확률에 달렸다는 걸 알면서도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백업도 그러리란 걸 알았다.
초조하고 욕심이 났다. 이제껏 해마와 경쟁해야 하는 순간은 없었다. 남들보다 뛰어날 필요도 없었다.
남들과 균일한 게 해마의 미덕이었다. 그러니 이 순간은 껍질 하나의 뚜게만큼이라도 더 앞서서 달리고 싶었다.
나의 완벽한 복사물, 나의 대체재, 나 자신이었던 저 존재를 너무나도 이기고 싶었다.
5. 나는 불가능한 확률로 여기 있는 게 아니라, 결정된 확률로 와있는 것이었다. 이제야 이 모든 것이 내 환상과 환각이
아니란 걸 믿을 수 있었다. 나는 이은하(추정)를 이은하(前 이미정)로 변경하고 깊게 안도했다.
6. 어떤 질문은 질문되지 않았기 때문에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직접 미래에 도착하는 것 외엔 알 도리가 없는 일들이 있다.
7. 무엇이 그리도 괴로울까? 사람은 해마와는 다르게 진실을 숨기기에 최적의 조건으로 설계됐는데.
인간이야말로 거말을 하기 위해 태어난 정밀한 기계인데. 너는 해마에겐 없는 거짓말할 자유를 가졌으면서,
왜 그 자유가 너를 부끄러운 존재로 만든 것처럼 굴까?
정작 해마는 진실 때문에 명예로울 일도 없고 수치스러울 일도 없는데 말이다.
8. 사람의 눈만 봐도 그 내면과 성정을 읽을 수 있다던 수많은 경구는 전부 허풍이며 날조다.
나는 수천 년의 역사와 수백억 명의 이야기를 사진보다 또렷하게 기억하는데, 한 사람의 눈을 이토록 오래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그 속이 어떨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9. 이미 서로가 서로에게서 충분히 분별된 존재인데 나 혼자 특별하게 분별되었다고 굳게 믿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일인가? 백업이 나를 결코 비파라고 부르지 않고 꿋꿋이 백업이라고 호칭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백업을 그렇게 취급했기 때문이다.
10. 경계에 서 있는 존재는 언제나 이름을 의심받는다... 나는 이미정을 통해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백업을 무색무취의 유령으로 만들었고, 이 무명의 분신을 최선을 다해 거부하고 억누르려 했다.
그런 취급을 받는 게 어떤 건지, 역시나 이미정을 통해 잘 알고 있었으면서.
11. 불안해하는 건 내가 아니라 아마 너일 것이다. 나는 네가 두려워할 것을 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두려워하는 건
사람의 숙명이고, 그걸 아는 건 해마의 숙명이다. 그러나 두려움이 네 삶의 전부는 아니었고 나 역시 해마의 인식을
뛰어넘는 아득한 것들까지 다 알지는 못했다.
12. 네가 이미정 기자든 이은하 기자든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도 알는지 모르겠다. 정말로 중요한 건 네가 너를 숙제로
삼았다는 것, 숙제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다시 펜을 쥐기로 한 것, 세상에 카메라를 들이대기로 마음먹었다는 것,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을. 하긴 이 또한 얼마나 쓸데없는 연산일까? 네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를지 구분하는 것
역시 해마의 오만이다.
13. 이 멍텅구리야, 넌 태어난 지 3분이 한참 지났는데도 갑문이 아름다운 줄은 모르지.
키워드: 유령해마, 해마, 허브, 중앙, 미정(未定), 갑문, 인공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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