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소설 | 증명된 사실 | 전자책 | 이산화 | 아작 | ★★★★★ |
후기 '외로움의 SF화'
요새 핫한 '이산화'작가의 작품이다.
일단 읽어보겠다고 야심차게 샀는데, 후기는 블로그에만 올리기로 했다.
이곳저곳에서 쏟아지는 말들 다 뒤로 제쳐놓고 책만 언급해보자면 진짜 재밌는 단편집이다.
각각의 작품이 긴 편이 아님에도 밀도있게 꽉꽉 차있어서 장편을 보는 듯 했다.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상상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과학의 영역을 살짝 입혀놓았다.
작가의 기발한 발상과는 별개로 각 단편마다 보이는 외로움에 눈길이 갔다.
책을 읽다보면 잡생각을 하다가 이상한 포인트에 꽂히는데, 이 책은 그 포인트가 '외로움'이 되었다.
재밌다는 말로 퉁치자니 복잡미묘해지는 책.
모든 단편이 훌륭했지만, 그중 특히 마음에 남는 두작품만 언급해보고자 한다.
1. 세상은 이렇게 끝난다.
학교를 증오한 나머지 '학교가 폭퐈됐으면 좋겠다.'를 행동으로 옮기는 '텔러'의 이야기.
첫번째로 등장하는 작품이다. '입시형 교육'에 시달려본 학생이라면 누구나 웃으면서 볼법한 내용이다.
나는 일찌감치 과학과는 담을 쌓은 사람이라 중간중간 등장하는 과학자나 과학용어에 낯설었는데,
그런 것들은 일일히 검색해봤다.
조금의 수고가 필요했지만, 작가의 의도를 잘 따라가는 느낌이라 전혀 힘들지 않았고 오히려 재밌었다.
특히 작중 묘사되는 학교분위기가 내 기억속 고등학교랑 닮아있어서 어딘지 모르게 친근하게 느껴졌다.
미션스쿨이라거나, 존재가 잊혀진 도서실이라던지 그런것들. 순간 작가랑 나랑 동문인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텔러'와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를 듣고있으면 최근에 읽은 <과학자는 전쟁에서 무엇을 했나>가 떠오른다.
둘의 논리적인듯한 말을 듣고있으면 흔히들 말하는 '미치광이 과학자'가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상상하게 된다.
이들에게는 희망적인, 내게는 절망적인 결말이 펼쳐지는데,
곧 사고에 휘말리게 될 '무고한 희생자'들을 생각하면 찝찝함이 계속해서 뒤따른다.
작가는 후기에서 '입시교육이 만든 괴물', '학교에 대한 복수극'이라고 정리한다.
'이야, 진짜로 학교를 폭파시키려고 하네.'라는 통쾌함보다는,
입시교육에 묻혀버린 학생 개개인의 목소리가 떠올라 씁쓸해지는 단편이다.
2. 희박한 환각
심해 생명체(루시)와 바다에 조난당한 주인공(빅터)이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
얼핏보면 굉장히 사랑 넘칠 것 같은 한줄 요약인데, 이 단편을 읽는 동안 꽤나 무서웠고, 동시에 외로웠다.
8백 기압의 해저에서 홀로 살아왔을 루시의 고독함, 태평양 바닥에 4년넘게 조난중인 빅터의 외로움.
고독함과 외로움이 만나 감정이 싹텄으나, 같은 곳을 향하지는 않았다.
기압을 넘어서 빅터를 만날 수 없다는 루시의 울음이, 바다에 홀로 남겨질까봐 두려운 루시의 외침이
가슴깊은 곳을 쿡쿡 쑤셔댔다. 그와 동시에 루시의 집착이 무섭게 느껴졌다.
당장은 아니지만 곧 빅터를 침범할 듯한 두려움, 어떻게든 그를 구속할 듯한 집착에 대한 두려움.
빅터와 함께 하고싶은 루시의 욕망이 결국 하나의 사건을 만드는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둘은 결국 함께하게 된다.
'종을 넘어서는 사랑'을 느끼기엔 '자연의 무서움'을 먼저 알아버렸다.
내 무서움과는 별개로 어쨌든 이것은 두 외로운 존재가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 단편이다.
그 외에도 1에 언급한 <세상은 이렇게 끝난다>의 프리퀄인 <한 줌 먼지 속>,
<연약한 두 오목면>, <증명된 사실> 등 재밌고 기발한 작품들이 많이 있다.
세상에 이 한권에 열 두편의 단편이 있다구요.
그 중에 장편으로 만나보고싶은 작품들도 두서너개 있었다.
단편집을 읽다보면 취향이 아닌 작품이 더러 있기도 했는데, 모든 단편이 마음에 들었던 책이었다.
긴 호흡을 좋아하는 나로써는 아무래도 장편에 손이 가는 편인데, 단편의 매력을 잔뜩 느낄 수 있었다.
단편이라고 해서 호흡이 짧지는 않더이다. (본인에게 하는 말)
모종의 사태가 아니었다면 존재를 몰랐을 책.
아작출판사 책을 몇 권 더 사뒀는데, 읽고있던 <유령해마>를 제외하고는 잠시 보류하려고 한다.
불매라기 보다는 판단이 필요한 문제라, 찝찝함이 가시고 나면 정독 유무를 결정하기로 했다.
인상깊은 구절
1. 인간관계란 수능과 같아서,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든지 심판의 날에 친구인 사람이 진짜 친구인 법이었다.
2. 학생은 결국 학교 교육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리고 괴물을 창조한 과학자는 그 괴물의 손에 보복당해 최후를 맞이하는 법입니다.
3. 영혼은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럼 죽은 뒤에 영혼들은 다 어디로 가는가, 그게 궁금한 거죠?
간단합니다. 우리는 중력 때문에 이 지구에 발을 붙이고 살지요. 하지만 영혼에는 중력이 작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구는 영혼을 놓고 가버리는 겁니다.
4. 여전히 내 세계는 한없이 쪼그라든 그대로였지만, 적어도 그날 그 세계의 밤하늘엔 기다리고 기다리던
유성우가 쏟아졌다는 걸 나는 똑똑히 기억해.
5. 우리는 우주에 대해 그만큼이나 많이 이야기했던 거야. 난간과 난간 사이 좁다란 보도를 나란히 왕복하던 그 찰나야말로
우리에게는 진정 시간과 공간을 가르는 여행이었던 거야...
6. 용을 물리치고 소녀를 구해냈잖아. 이런 굉장한 이벤트를 거친 커플이 둘이서만 살았다 해서, 절대 외롭고 비참했을
리가 없지. 난 아주 잘 알거든.
7. 오래 걸렸어. 그동안 루시는 많이 변했어. 어쩌면 예전과 같은 루시가 아닐지도 몰라. 사실은 지금도 그 부분이 조금
두려워. 루시는 가능한 한 그대로 있으려고 했는데, 완전히 그대로 있지는 못했을지도 몰라.
8. 그런데 다른 방법이 없었어. 사랑하는 진동을 사랑하지 않는 진동으로 바꾸는 일은 간단하지 않았어.
루시는 머리가 좋으니까, 신호를 해석할 수 있으니까. 루시가 아직도 어쩔 수 없이 빅터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
그러고 나서는 순식간이었어.
꼬리(연결고리): 과학자는 전쟁에서 무엇을 했나
-단편 <세상은 이렇게 끝난다>에 언급된 과학자들의 각종 연구들을 살짝 훔쳐볼 수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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