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0년 독서기록

57. 파과-20.05.03~05.04

by 독서의 흔적 2020. 5. 4.

한국소설 파과 전자책 구병모 위즈덤하우스 ★★★★★

 

후기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상처받은 이들의 이야기'

이제 겨우 두 작품 읽었지안, 상처입은 사람들의 삶을 너무 처절하지 않게,

적당히 아련하게 표현하는데 탁월한 작가님인듯 하다.

다른 책 찾아서 가볍게 시놉만 읽어보니 이런쪽으로 정통이 난 작가님이시네.

<아가미>만큼 <파과>도 너무 아프네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이집저집 떠돌다 류를 만나 킬러가 된 조각.

업무가 '제거'로 통칭되던 시설에 발을 들여 '방역'에 이르기까지 일하다보니 어느새 60대가 되었다.

늘 조각을 견제하고 시비를 걸어오는 젊은 에이스 투우. 사실 그는 조각과 어린시절부터 얽혀있는 사이다.

조각을 이 세계로 끌어들인 류. 그는 업계를 여기까지 키운 수완가이자 조각의 연모대상이었다.

임무에서 큰 실수를 하여 부상을 입었던 조각을 치료해준 강박사.

조각은 그를 입막음하고자 찾아간 과일가게에서 언젠가 자신이 어렴풋이 꿈꿔왔던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보았다.

나이 탓일까...무정했던 조각은 점차 감정이 되살아난다.

도움을 주었던 리어카의 노인이 죽고, 그저 바라만 보고싶었던 강박사의 가족에게 사건이 벌어지자

조용히 끓어오르며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전투를 준비한다.

그의 감정을 이렇게 끌어낸 사람은 누구이며, 이 전투의 끝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애석하게도 책을 많이 읽다보면 어느순간 눈에 그려지는 전개가 있다.

그럼에도 계속 책을 읽는 것은, 그것을 이끌어가는 작가의 스토리텔링에 강하게 이끌리기 때문이다.

<파과>도 그러했다. 예상한 전개였고, 예상한 결말이었으나 작가가 그려내는 심리표현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이제 알약, 삼킬 줄 아니." 이 한구절을 위해 달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를 둘러싼 단단한 껍질이 깨지고, 비로소 멈춰있던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나는 이 '파과'라는 제목이 부정적인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받아들였다. 

어느새 농익어 단내를 풀풀 풍기는 그것은 찰나의 행복을 허락하기로 했다.

업계에서 손톱으로 통칭되던 조각은 이제 손톱에 네일아트를 한다.

외로움과 익숙한 조각이 어떤 행복을 만나게 될지 무척이나 궁금하지만, 작가는 우리의 상상에 맡겨놓았다.

 

상처를 제대로 감출 줄 모르는 사람에게 눈길이 가는지라

아가미에서는 강하가, 파과에서는 투우가 계속 눈에 밟힌다.

투우가 바라던 것은 어린시절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일말의 죄책감을 보는 것이었을까.

결국 누가 문제냐, 를 생각해보면 이들을 방치한 사회구조가 제일 문제인듯하다.

누구하나 손내미는 사람이 있었다면, 이렇게 극적인 상황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텐데...

이런 가정을 수없이 할 수 있으니 더 아픈 소설이 아닐까싶다.

지인이 읽고나서 어떤 배우가 어울릴지 상플해주세요! 라고 했는데,

다른 역은 모르겠고 조각역은 문숙선생님이 해주셨으면 합니다...

 

인상깊은 구절

1. 아이의 팽팽한 뺨에 우주의 입자가 퍼져 있다. 한 존재 안에 수렴된 시간들, 응축된 언어들이 아이의 몸에서 리듬을 입고 튕겨 나온다.

누가 꼭 그래야 한다고 정한 게 아닌데도, 손주를 가져본 적 없는 노부인이라도 어린 소녀를 보면 자연히 이런 감정이 심장에

고이는 걸까. 바다를 동경하는 사람이 바닷가에 살지 않는 사람분인 것처럼. 손 닿지 않는 존재에 대한 경이로움과

채워지지 않는 감각을 향한 대상화.

 

2. 굳이 먹어보지 않아도 입안에 도는 감미, 아리도록 달콤하며 질척거리는 넥타의 냄새야 말로 심장에 가둔 비밀의 본질이다.

우듬지 끝자락에 잘 띄지 않으나 어느새 새로 돋아난 속잎 같은 마음의.

 

3. 그것은 기억과 호환되지 않는 현재였고 상상에 호응하지 않는 실재였으며, 영원히 괄호나 부재로 남겨두어야만 하는 감촉이었다.

 

4. 이런 때에 더욱 선명해지는 죄악감이란 이를테면 물을 삼키는 그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소리 같은 사소한 것에조차

심장이 술렁인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마음은 어디에도 파종할 수 없이 차가운 자갈 위에서 말라비틀어져 마땅할 터였다.

 

5. 류의 유지를 받을어, 같은 생각은 해본 적 없었고 애당초 유지라는 게 있지도 않았으며 방역업을 시작한 뒤로 삶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 아닌 현재멈춤형이었다.

 

6. 미안합니다. 그건 나 때문입니다. 내 눈이 당신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이 눈으로 심장을 흘리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7. 사라진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은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키워드: 복숭아, 킬러, 심장, 알약
꼬리(연결고리): 킬러분식

-누군가를 향한 칼날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다. 피를 묻힌 사람에게 진정한 휴식은 없는 것일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