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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독서기록

183. 아주 오래된 유죄-20.11.18~11.20

by 독서의 흔적 2020. 11. 22.

젠더/여성문제 아주 오래된 유죄 종이책 김수정 한겨레출판 ★★★★★

 

 

후기: 여성을 위한 연대는 끝나지 않았다.

'책과 책이 이어지는 꼬리'의 종착지를 드디어 만났다.

올해 읽었던 여성인권 관련 책들이 여기서 한데 뭉친다. 익숙한 사례,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죽음, 익숙한 승리.

김수정 변호사가 여성인권을 위해 얼마나 오래 힘써왔는가를 느낄 수 있었던 책이다.

 

올 3월부터 (내 기준) 참 많은 책을 읽었다. 그 중 최대의 관심사는 여성인권이었다.

내내 미묘한 성차별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내 안의 뭔가가 폭발하듯이 깨어난 것은 미투운동이 확산되면서 부터다.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목소리들과 함께 분노하고 싶은데, 내 목소리는 너무 작고, 내 배경지식마저 너무 얕아서 주저하곤 했다.

'잘 싸우려면 잘 알아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하나 둘 읽기 시작한 여성 인권 관련 도서들.

출간일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읽어댔지만, 과거에도 현재에도 여성 인권의 현주소는 여전히 처참했다.

작가들은 '그때보다 많이 나아졌다'는 말로 독자를 위로하지만, 여권 신장의 길은 멀기만 하다.

 

<아주 오래된 유죄>는 20여년간 여성 변론에 앞장 선 김수정 변호사의 판결 아카이브이다.

남초 중의 남초. 남성의 입김이 거세게 불어대는 곳, 가장 기울어진 운동장 법정.

판사의 망치 하나에 유무죄가 판가름나는, 최전선에서 싸운 기록을 찬찬히 읽었다.

책에 나온 사례 중 다수는 이미 접한 적이 있는 것이었다. 낯설지 않은 울음이 마음 깊은 곳을 쿡. 쿡. 찔러댔다.

"책에서 다룬 사례들은 너무 고통스럽고 비참하기까지 한 예가 없지 않지만, 너무 비관적으로만 읽히지 않길 바란다."

시작에 앞서 작가가 한차례 조언을 했으나, 도무지 진정되질 않았다.

손 끝너머 전해지는 생생한 울음을 들으며 어느 누가 진정할 수 있겠는가.

아는 목소리라고 해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저 울음 뒤에 수많은 자매가, 세상을 등진 피해자가, 앞을 향해 나아가는 생존자가, 그리고 내가 있었다.

내 한 숨은 한심한 법정에 보내는 한 숨이었고, 내 눈물은 피해자들에게 보내는 위로와 연대의 눈물이었고,

내 분노는 그럼에도 변할 생각이 없는 일부 남성과 지지자들에게 보내는 분노였다.   

아무리 좋은 책인들 흠이 있는 법이다. 사람이 어떻게 늘 옳을 수 있겠는가. 이 책에도 그런 흠이 존재하긴 했다.

그럼에도, '최전선에서 만난 생존 피해자들의 분투기'이기에 죽을 때까지 품고가기로 결심했다.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 피곤한 일이다.

언제 어디서 (여성혐오적) 무차별 폭행을 당하게 될 지, 불법촬영을 당하게 될 지 늘 긴장한 상태로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감히 모든 남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가다니!"라며 자신을 변호하기에 급급한 한심한 남성들과 척을 지는 것은 기본이다.

자신이 아닌 경우에는 공감능력이 결여되는 사람이 가득한 틈바구니에서 내 목소리를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아주 크게 소리쳐야 들릴까 말까. 뭔가를 잃을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 여성에게 마이크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은' 수많은 여성들이 남긴 발자국 위에 내 발을 살며시 얹어 본다.

깊게 패인 발자국 위를 또 다른 생존자들이 하나 둘 걸어간다. 때로는 주저하며, 그리고 꾸준하게, 묵묵히, 점진적으로.

아주 오래된 유죄는 현재 진행형의 유죄이고, 처벌하지 못한 유죄는 산더미처럼 불어나는 중이다.

그나마 납득할만한 판결문의 잉크는 채 마르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도 목마르고, 여전히 바쁘다.

 

방류할 때를 놓친 댐은 언젠가 넘치기 마련이다. 그리고 지금, 여성을 옭아매는 댐이 넘실거린다. 한계치에 달한 듯이.

모른척 뒤섞여 살기엔 이 댐은 한 쪽으로 너무 기울었다. 오르막 길인줄 알았더니, 가파른 낭떠러지였다.

살기 위해 같은 곳을 수십, 수천, 수백만번 때렸더니 작은 금이 생겼다.

촘촘한 금 사이로 너도나도 목소리를 토해낸다. "여자도 사람이에요!"

황급히 땜질을 한들, 이제 곧 머지않았겠구나, 곧 터져버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를 잠재우려는 '더 큰 파도가 몰려오지 않을까'하는 불안감이 있지만, 모두와 함께라면 괜찮으리라고 믿는다.

혼자가 아님을 알게된 순간부터 더 이상 외롭지 않다. 손 내밀면 흔쾌히 잡아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안다.

'포기하지 않은 여성들'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변론에 앞장선' 연대의 기록.

작가 후기에 이어 이렇게 마무리해본다. "여성을 위한 연대는 끝나지 않았다"

 

+) 점잖은척 마무리 지었지만, 읽으면서 속에서 열불이 나고. 사방팔방에 미친사례 천지빽가리...

'이 사례도 미쳤고, 저 사례도 미쳤네'하면서 플래그 붙이다보니, 색색의 플래그가 찬란하게 빛난다.

이만큼의 억울한 목소리가 있었고, 그나마 기록으로 남은 목소리가 이만큼이라는 거겠지. 아프고 슬프다.

 

 

인상깊은 구절

1. 여성들의 싸움은 돌을 굴려 산 정상에 올려놔도 내일 다시 또 굴리기를 반복해야 하는 시지프스의 절망과는 다른 것이다.

같은 싸움이 반복되는 것 같아도 같은 싸움은 없다. 포기하지 않은 싸움에는 늘 한발 전진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2. 여자들이 미러링하는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은데, 내 눈에는 싫어하는 벌레가 온몸에 잔뜩 들러붙었는데

이를 떼어내지 못해 몸부림치는 고통으로 느껴진다. 내 눈에 미러링은 여성의 비명이다.

 

3. 공감능력이 떨어지고 세상 돌아가는 본새를 전혀 모르는사람들이 일부 있을 수도 있겠다고 넘겨버리기에는 소리가

너무 크다. 저들은 마치 남자들만의 이어도에서 살아온 사람들만 같다. (중략) 그 세상에서 나(너)의 어머니, 누이, 아내,

애인이 살아가고 있다. 그녀들은 남의 상갓집에 와서 떠들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집 초상에서,

바로 자신의 장례식장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이다.

 

4. 내가 꿈꾸던 미래는 새로운 것이 가득한 세상이었는데, 막상 맞이한 건 아주 오래된 것들이 더욱 썩고 부패해 냄새가

진동하는 미래였다. 나를 지켜보던 두 눈은 눈부신 기술의 발달로 기게로 대체됐을 뿐이고, 입으로 사진으로 전달되던

것들이 인터넷 회선을 타고 순식간에 퍼져나가는 것으로, 영원히 지울 수도 없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5. 여성들이 말하고 외치고 드러내는 것은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는 징표다. 희망이 좌절되는 순간

그녀의 이례적인 죽음은 일상이 되어, 집단으로 뛰어내려 자살하는 레밍처럼 모두가 손을 잡고 절벽 아래로 떨어질지도

모른다. 이른 새벽, 희망의 좌절보다 희망의 실현을 믿고 싶다. 혐오와 차별의 언어보다 공감의 언어가 훨씬 더 힘이

세다는 것을 믿고 싶다.

 

6. 공중 보건의인 한 이용자는 9세 아동 성착취 영상물 등 불법 영상 33개를 다운받아 소지하고 있었는데도 형사처벌되면

취업이 제한된다는 이유로 벌금형마저 선고 유예됐다. 이 정도면 처벌이 아니고 가히 '대접'이라고 할 만하다.

명백한 성범죄를 저지르고도 이처럼 대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7. 가장의 책임이란, 가장이 되어야 할 성인 남자가 짊어진 책임이란 이렇게 무거운 것이어서 웬만한 성폭력은 성폭력이

아니고, 성폭력이라고 해도 가장 노릇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책임만 지운다. (중략) 아이들의 성을 사는 사람이 누구인가.

어른들이 아이들을 보호하지 못한 책임을 더 이상 아이들에게 묻지 말라.

'남성'이라는 이름이 더 이상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8.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 (이마저 졸속 입법이자 디지털 성착취 영상의 피해를 간과한 입법이라는

비판이 쇄도했다)이 통과될 당시 의사록에 남은 명언들을 확인해보자.

-일기장에 혼자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처벌할 수는 없지 않나. (송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

-자기만족을 위해 이런 영상을 가지고 나 혼자 즐기는 것까지 갈 (처벌할) 것이냐. (정점식 미래통합당 의원)

-자기는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만들 수 있다. (김인겸 법원행정처 차장)

-청소년이나 자라나는 사람들은 자기 컴퓨터에서 그런 짓 자주 한다. (김오수 법무부 차관)

2020년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리더들의 현주소다.

 

9. 한 명이 당하면 우연한 사건이지만 다수가 당하면 사회현상이다.

 

10. 낙태를 하는 여성도, 낙태에 찬성하는 여성도, 그 누구도 생명이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배 속의 태아일 때든 태어난뒤든, 아이를 감당해야 할 '이미 태어난 사람'인 여성이 자기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일 뿐이다.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온갖 어려움은 오롯이 여성에게 짊어지게 하면서 태어나지 않은 생명의

고귀함만을 내세우는 것은 위선이다.

 

11. 가부장 사회의 룰을 어기고 감히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를낳은 미혼모에 대한 최대의 처벌은 아이를 키울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이마에 주홍글씨를 새겨 넣는 대신 아이를 빼앗음으로써 심장에 죽어도 지워질 수 없는 고통의 각인을

새겨 넣고 여성들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가부장 질서를 어긴 여성에게 주어지는 처벌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를.

 

12. 도대체 여성의 몸은 왜 또 이리 쓰임이 많단 말인가. 왜 하필 여성만이 난자를 배출하고 자궁이 있단 말인가.

여성의 몸, 여성의 자궁, 여성의 출산 능력은 경외의 대상이면서도 왜 이리 하찮게 취급되는가. 난자 채취든 대리모든,

임신 출산 등 여성의 재생산 능력과 권리 보장을 중심으로 한 정확한 연구와 정보 제공은 왜 이렇게 부족한가.

 

13. 감염병의 위기는 공동체가 협력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었지만, 역설적으로 차별과 배제의

실상도 낱낱이 보여주었다. 감염병 이후의 세상에 대해 낙관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나는 두렵다. 마트의 계산원들처럼

위기 상황을 이용하여 조용히 치워지는사람들, 그리고 '집단 감염'이라는 공포심에 포획된 채 누군가 치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위장된 평화에 길들여지는 것이 감염병 위기 이후의 세상일까 봐.

 

14. 어린 여공들이 폐병에 걸려가며 만들어내던 물건들을 팔아, 기지촌 여성들이 '양공주' '양색시' 소리 들어가며 벌어들인

달러를 밑천 삼아 이룩한 번영인데, 그것을 누리면서 돌려주는 것은 조롱과 멸시였다. 그들이 무엇을 위해 왜 싸우고 있는지,

왜 죽었는지 진실은 어느새 중요하지 않게 된다. 여자라는 그 이유 하나로.

 

15. 여성이 어떻게 살았고, 무엇이 되었고, 무슨 말을 하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헌신을 했든, 투쟁을 했든,

엄청난 성취를 이루었든 '여성'이라는 자체, 그것이 문제다.

 

 

키워드: 여성(대상)범죄, 여성 혐오, 유죄, 연대, 성폭력, 가정폭력, 가부장제, 변론,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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