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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독서기록

122. 증강 콩깍지-20.08.11

by 독서의 흔적 2020. 8. 12.

한국소설 증강 콩깍지 전자책 황모과 안전가옥 ★★★★★

 

후기 '거울 속 나를 온전하게 직시할 수 있는가'

읽는 내내 '콩깍지'라는 어플에 강한 기시감이 들었는데,

'한남 필터로 살았던 3'이라는 지유의 블로그를 통해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안경이나 콘택트 렌즈와 연동되어 타인을 미리 장착한 필터의 모습으로 래핑해 주는

증강 현실 소프트웨어 영상 보정 앱. 일명 콩깍지.

주인공인 윤성은 짧디짧은 사랑의 유효기간을 연장시켜준다.’ 는 핑계로 애인 지유에게 다양한 필터를 씌우며 만나왔다.

한 달 주기로 필터를 바꾸던 윤성은 이제 포르노 여배우 필터를 2~3일 주기로 바꾸기 시작한다.

아시아에서 러시아와 유럽으로 그리고 서쪽으로. 필터를 바꾸는 그의 손은 거침이 없다.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을 하고 업무를 보던 어느날, 상사에게 포르노 여배우 필터가 래핑된것을 발견한다.

화들짝 놀란 그가 황급하게 화장실로 달려가보았더니 이제는 본인에게 할아버지의 필터가 래핑되어있는게 아닌가.

사태는 점점 심각해져 이제 윤성만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원수의 필터가 래핑된, 일면식이 없는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한차례의 거대한 혼란 뒤에 콩깍지 어플을 만든 기업은 파산했다.

콩깍지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고, ‘자각몽 섹스라는 VR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

여전히 보고싶은 것만 보는 사람들의 일상에 이런 기술이 자리잡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 한 개인의 문제라기 보다는 미디어와 자본주의의 협공에 의한 결과라는게 참 씁쓸했다.

"패턴 외의 것을 찾는 사람은 숫자가 너무 적어 소비자로 인정되지 못한다.

한 가지 상품을 한꺼번에 팔아먹어야 편하니 다양함은 용납할 수 없다는 뻔한 상술."

이 구절을 보는데, 더이상 프리사이즈가 아니게 된 프리사이즈 여성복들이 제일 먼저 생각났다.

콩깍지에 어떻게든 자신을 욱여넣어보는 사람과 콩깍지를 벗을 생각이 없는사람들 사이에서의 나.

이렇게 말하는 나 또한 누군가를 타인의 시선이 더해진 콩깍지로 봐왔기에,

내 치부를 들켜버린 것 같아서 찝찝하기도 하고 그렇다. 약간의 자괴감과 자책, 그리고 죄책감.

 

시각적인 효과 유무의 차이일 뿐, 현실에는 이미 수많은 콩깍지가 존재한다.

타인을 볼 때 그 어떠한 평가 없이, 본질을 본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리고 그 평가는. 누군가의 시선이 더해지지 않은 나만의 시선이 확실한 것일까.

당장 우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온전하게 직시할 수 있는가.

읽으면서도, 읽고나서도 온갖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했다.

윤성의 말도 안되는 자기합리화보다 몇 안되는 지유의 말들이 귓가를 맴돈다.

남자들의 시각적 욕망을 정당화하는 작품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지극히 현실 비판적인 씁쓸한 작품이었다.

 

인상적인 구절

1. 언제나 그랬다. 세상은 언제나 문제투성이고, 문제는 늘 구정물 속 침전물처럼 걸쭉하게 가라앉아있다.

바닥을 헤집지만 않는다면 고요한 구정물은 맑아 보이기도 한다. 멸균된 듯 깔끔한 인터넷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소독약 냄새가

풍기는 것 같았다. 알고 싶은 현상은 단순한데 너무 많은 서술이 넘치고 있다. 실체적 애매함이 세상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애매하고 흐릿한 것들은 우리의 숙고를 막는다. 소독약이 외친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2. 넌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걸 계속 나한테 투영시키면서 나를 끔찍하게 목 졸랐어.

너한테는 게임이었을지 몰라도 나한테는 폭행이었다고. 알아듣겠니?

 

3. 너랑 같이 있으면 나는 그냥 도구가 되더라. 사랑받지 못한다는 스트레스가 나를 망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

이제 더 이상 너와 같이 지낼 수가 없어. 네 시선이 나 자신마저 견디기 힘들게 만들었으니까.

난 내가 죽어 가는 걸 계속 두고 볼 수 없어.

 

4. 앱과 렌즈를 버렸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누군가의 시선을 빌려 상대를 본다. '성공했으니까. 돈이 많으니까. 권력 있는 자리에

올랐으니까'라는 타인의 판단 속에  숨은 제삼자의 콩깍지를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몸 안에 들인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판단하려는 순간에도 타자의 시선을 뒤집어쓴다. 뭐가 제대로인지 판단해 낼 자신이 없다. 자발적인 선택이라 부를 만한 게

아무것도 없다. 최종 선택은 나의 자유의지로 했다지만 어쨌든 타인의 유도에 이끌린 것이 아닌가.

 

5. 자본주의는 개인의 선호를 조작하면서까지 상품을 판매하려 든다. 각자의 취향을 일일이 맞춰주기 힘들다는 이유로

미의 기준을 획일화하는 것이다. 얼핏 다양해 보이지만 실은 한정된 패턴이 준비되어 있을 뿐이다.

패턴 외의 것을 찾는 사람은 숫자가 너무 적어 소비자로 인정되지 못한다. 한 가지 상품을 한꺼번에 팔아먹어야 편하니

다양함은 용납할 수 없다는 뻔한 상술.

 

키워드: 콩깍지, 증강 현실 소프트웨어, 시각적 비아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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