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0년 독서기록

104. 창백한 말-20.07.03~07.04

by 독서의 흔적 2020. 7. 4.

한국소설 창백한 말 전자책 최민호 황금가지 ★★★☆☆

 

후기 '우리는 운전자 없는 트럭이다'  

좀비바이러스가 창궐해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면역자와 보균자는 권력으로, 빈부격차로, 생존확률로 각자의 위치를 확인하게 된다.

이 좀비세상에는 위기를 기회로 삼고, 그 수혜를 입은 기업이 하나 있다.

바로 국가를 초월하는 권력을 지닌 '구인제약'이다.

<창백한 말>은 바이러스를 빌미로 거대 카르텔을 만든 구인제약에 맞서싸우고자 하는 약자들의 이야기이다.
언뜻보면 기업과의 싸움을 통해서 큰 메시지를 주는 것 같은 작품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이들의 싸움은 거대조직에 균열조차 내지 못하고 급격하게 힘을 잃는다.
서사를 장황하게 이어나가다가 50페이지만 남았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기대한 결말이 있었는데, 어찌나 현실반영이 잘 되었는지 결국 그 장면은 볼 수 없었다.

"아무리 뒤를 캐봐도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그런 트럭들밖에 없어.

그걸 운전한 놈들은 보이지도 않고, 어쩌면 아예 없을지도 몰라."

책 속 대사처럼, 운전자는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아래에서 갈려나가는 군인과 민간인이 있었을 뿐. 뒷맛이 쓰다.
등장인물들이 "진실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고 끊임없이 힌트를 주고있지만, 그럼에도 허탈함을 떨칠 수가 없다.
이렇게까지 언행일치하는 작품은 처음이라 당황했지 뭡니까.
복잡한 이야기가 되겠다 싶어 온갖 정보를 메모한 내 손이 머쓱해진다.
특히 규혁은 굳이 등장했어야하나, 서사를 여기에 몰아줬어야하나 싶을정도로 불쾌한 등장인물이었다.
결말까지 잘 데리고가다가 머리채 잡힌 채로 문전박대 당한 기분이다.
이럴거면 수진이 그 모진 시련과 고난을 겪을 필요가 있었을까.
모성애와 죄책감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모터엔진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영의 죽음이며, 희원의 직업이며, 혜진의 존재이유며

당췌 이게 뭔가 싶고, 여성인물들 활용에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큰 임무를 완수할 것 같았던 조직의 정체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끝이 났다.
결국 어느것 하나 정확한 답변을 얻지 못했고, 신나게 휘둘리다 독자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이런식의 결말이라면 장석호 선에서 이끌어가도 될 이야기였는데,

굳이 음모론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나 하는 강한 의문이 남았다.
중반부까지의 서사, 그리고 제목이 뜻하는 바가 굉장히 인상적이었기에 더더욱 허탈하다.

 

인상깊은 구절

1. "사장님이 그때 말씀하셨죠. 회오리바람 속에서는 전부 똑같은 사람이 된다고."

석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입 다물어, 멍청아! 그냥 밖으로 나가!

그녀는 머릿속으로 들리는 절박한 외침을 외면했다. 수진은 고개를 돌리고 석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사장님과 나는 가족이 아니에요."

수진은 핸드백에서 봉투를 꺼내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추스르며, 돌아보지 않으려 애를 쓰며 밖으로 나왔다.

 

2. 최 이사의 말투에는 현실과 희망을 역전시키는 기묘한 힘이 들어 있었다.

이미 일어난 일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형식으로 바꿔 놓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힘이었다.

석호는 그리고,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최 이사가 들고 있는 펜은 필부들의 것과 달리 현실이라는 페이지 위에 직접 작용하는 물건이었다.

실수로 뭔가를 잘못 적었다면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다.

문단을 통째로 들어내거나 필요한 부분을적절히 삽입하는 것도 가능하다.

 

3. 뉴스에서는 안심하라는 이야기뿐이었다. 비상령도 경보 단계는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듯 정부는 제대로 경고하지 않는다. 불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정확한 정보는 오직 안전한 이곳에서만 들을 수 있다.

 

4. 육지 쪽 사람들은 말이야, 이상한 습성이 있어. 한 100미터 앞에서 사자 한 마리가 달려온다고 치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도망쳐야 해. 곧바로. 미적거릴 이유가 없지.

근데 그걸 안 한단 말이야. 사자가 사람들을 막 물어 죽여. 그걸 뻔히 보면서도 이렇게 생각하는 거야.

저놈은 나한테까진 안 올 거야. 올 거 같지만 안 와. 저렇게 많이 물어 죽였으니까 나는 안전할 거야.

그렇게 말이야. 그러다가 막상 사자가 자기 목을 콱 물면 억울하다고 징징 짜지.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느냐고.

 

5. 실탄을 절약하려면 묻어 버리는 게 제일 효율이 좋았으니까.

깊이가 3미터도 넘는 구덩이에 그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떨어지면 대부분은 어디 하나가 부러져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해.

나중에 떨어진 사람들 사정은 좀 괜찮았지. 아래쪽 인원들이 쿠션 역할을 해 준 데다,

구덩이 깊이도 줄었으니 조금만 용을 쓰면 나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을 테니까.

어쩌면 그게 더 나쁠 수도 있지만 말이야. 그래서 나중에 떨어진 사람들은 모두 바깥으로 기어 올라오려고 필사적이었지.

가까스로 올라와 봤자, 지키고 선 소대원들이 개머리판이나 전투화 굽으로 머리를 찍어 버렸지만. (중략) 그걸 살처분이라고 불렀지.

 

6. 우리는 지금 군인이 아니라 트럭 같은 거라고 하더군.

운전사가 사람을 깔아뭉개라고 엑셀을 밟으면, 그대로 뭉개야 하는 거라고 말이야. 알겠나?

아무리 뒤를 캐 봐도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그런 트럭들밖에 없어. 그걸 운전한 놈들은 보이지도 않고, 어쩌면 아예 없을지도 몰라.

자네 동생이 휘말린 건 안된 일이지만 그렇다고 자동차에 화풀이를 하는 건 멍청한 짓이야.

그리고 그렇게 희생된 사람들에게는 아무도 개죽음이었다고 말하지 않아. 그건 그냥 어쩔 수 없는 사고일 뿐이니까.

 

7. 면역자의 아이는 면역자고 보유자의 아이는 보유자다. 이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격차가 행정의 무의식을 결정했다.

북쪽 나라의 국민들과 달리 아무런 자원도 받지 못하는 보유자들은 결혼과 출산을 극도로 꺼린다.

가족의 수에 따라 약값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게다가 가족은 너무 가까워서 위험하다. 성욕은 결혼을 통하지 않고 해결한다.

남쪽에 한해, 이미 정부는 성매매에 그 어떤 통제도 가하지 않는다. 아파트보다 모텔이 더 많다는 비공식적 통계도 떠돈다.

설사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만약 실수로 아이를 임신했다면,

보유자들은 값싸고 수월하게 중절 수술을 받을 수 있다. 오직 이 명목에만 정부는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8. 군의 입장에서는 보유자가 바퀴벌레와 같지만, 구인제약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고객들이다.

그 결과 보건군과 구인제약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합의서가 탄생했다. 지금 세상은 그합의서가 설계한 것이다.

보유자는 서서히 자연적으로 도태되며, 그 시간 동안 구인제약은 충분한 자본을 벌어 도저히 망할 수 없는 기업 체제를 구축한다.

실제로 구인제약은 이제 더 이상 약만 만드는 회사가 아니었다. 엄연한 문어발식 거대 기업체였다.

 

9. 개인적인 일?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딨어? 먹고, 자고, 싸고, 전부 남한테 폐 끼치는 일이야.

그걸 인정 안 하면 사람답게 사는 게 아니라고. 사람한테 개인적인 일이란 건 없어.

 

10. 손을 들어 두드렸다. 탕탕탕. 바깥에 괴물이 다 죽고 안전해지면 엄마가 너를 데리러 올 거야.

그러면 문을 세 번 두드릴게. 너도 세 번 두드려. 그 다음에 두 번, 그 다음에는 한 번이야. 그게 암호야.

저번에 늑대랑 양 이야기 읽어줬지? 엄마인 거 꼭 확인하고 열어줘야 해?

약속대로 탕탕, 두 번 두드림이 돌아왔다. 수진은 또 한 번 두드렸다. 한에서도 한 번. 암호를 풀었다.

이제 열려야 했다. 그러나 열 수 없었다. 열리지 않았다.

 

11. 수직적인 것은 효율적이지만 언제나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지요.

머리를 자르면 손발은 그저 덩그런 살 덩어리, 즉 무용지물이 됩니다.

고등동물의 두개골이 단단한 이유는 명령을 내리는 뇌를 보호하기 위해서라, 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죠, 수평적인 것은 비효율적인 만큼 끈질기게 살아남는 데는 일가견이 있죠.

이것은 정체를 가늠하기 힘든 존재입니다. 세포 하나하나마다 제각기 사고를 하는 생물을 생각해 보세요.

어떤 시점에는 형체가 보이다가, 시간이 흐르면 희미해집니다.

당장 잡아다가 기요틴에 처넣어 댕강 목을 잘라 버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죠. 왜? 어디가 목인지, 알아야 자를 것 아닙니까!

 

12. 너도 트럭이지. 근데 운전사가 없어. 미안하다, 아가야. 전부 어른들 잘못이란다.

그래도 너는 죽어야 해. 살아 있으면 안 된단다. 이해해라.

 

키워드: 좀비 바이러스, 면역자, 보유자, 휴머넥스 2000, 구인제약, 구인밴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