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소설 | 소년이 온다 | 종이책 | 한강 | 창비 | ★★★★★ |
후기 '우리는 모두 그날의 목소리를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다.'
언제부턴가 5월 18일이 되면 늘 생각나는 책이 있다.
약 3년전 읽었던 이 책을 다시 꺼내들었다.
두려웠다. 이걸 또 다시 읽을 수 있을까. 이 책은, 지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책일까.
많이 울었더랬다. 터져나오는 울음을 막지못했고, 책장은 쉬이 넘어갈 줄을 몰랐다.
그때는 우느라 차마 담지 못한 글들을 하나 하나 아로새겼다.
눈물을 흘리는 순간 그들의 이야기도 내 몸 속에서 흘러나갈 것만 같아, 안간힘을 다해 붙들고 있었다.
그제서야 내가 놓쳤던 목소리가 하나 둘, 들리기 시작했다.
희생자로 불리지 않기 위해 남았다는 그들의 목소리가,
도청을 가득 메운 그 목소리가,
민주주의를 애타게 부르짖던 그 목소리가,
누구보다도 뜨거운 생명으로 가득찼던 그 목소리가.
아, 내게도 소년이 온다.
어둡고 축축한 그늘을 걷어내고 환한 빛을 비추는 길을 따라 단단한 걸음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감히 내가 어떻게 다 따라갈 수 있을까.
그 처절한 외침을, 울분을, 분노를 어떻게 다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지겹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때까지 기억하고 함께 외치는 것이다.
이것은 '폭동'이 아니었다고.
당신들이 누리고 있는 그것들이 전부 어디에서 왔는지 아느냐고.
우리 모두는 그때의 광주에 빚을 지고, 그 목소리들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이다.
이 모든 것이 유의미 해지는 그 날. 광주의 6월이 시작되리라.
때로는 책의 무게를 채 이겨내지 못하고 많은 말을 삼키게 되는 경우가 있다.
소년이 온다는 내게 늘 그런 책으로 남을 것만 같다.
인상깊은 구절
1.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들여다볼 때, 혼도 곁에서 함께 제 얼굴을 들여다보진 않을까.
2.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3. 누가 나를 죽였을까, 누가 누나를 죽였을까, 왜 죽였을까. 생각할수록 그 낯선 힘은 단단해졌어.
눈도 뺨도 없는 곳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피를 진하고 끈적끈적하게 만들었어.
4.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
5. 당신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당신을 보았던 내 눈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내 귀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숨을 들이마신 허파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6.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아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7. 김진수의 죽음을 심리적으로 부검하고 있다는 선생의 말을 나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지금 내 말들을 녹취함으로써 김진수가 죽어간 과정을 복원할 수 있습니까? 그와 나의 경험이 비슷했을지 모르지만,
결코 동일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혼자서 겪은 일들을 그 자신에게서 듣지 않는 한,
어떻게 그의 죽음이 부검될 수 있습니까?
8.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9.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10.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11.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12.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렇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13.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키워드: 광주민주화운동, 5.18, 광주, 전두환, 공수부대, 도청, 태극기, 빛, 꽃
꼬리(연결고리): 김남주 '학살2'
-시 전문을 첨부한다.
오월 어느 날이었다
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경찰이 전투경찰과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전투경찰이 군인으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이 차단되는 것을
아 얼마나 음산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총검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야만족의 침략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악마의 화산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아 얼마나 무서운 밤이었던가
아 얼마나 노골적인 밤이었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밤 12시
도시는 벌집처럼 쑤셔놓은 심장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었다
밤 12시
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밤 12시
밤은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의 눈동자를 파먹고
밤 12시
학살자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시체의 산을 옮기고 있었다
아 얼마나 끔찍한 밤이었던가
아 얼마나 조직적인 밤이었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밤 12시
하늘은 핏빛의 붉은 천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한 집 건너 울지 않는 집이 없었고
무등산은 그 옷자락을 말아올려 얼굴을 가려버렸다
밤 12시
영산강은 그 호흡을 멈추고 숨을 거둬버렸다
아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렇게는 처참하지 않았으리
아 악마의 음모도 이렇게는 치밀하지 못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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