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독서기록

59. 경찰관속으로-20.05.06

독서의 흔적 2020. 5. 7. 12:27

에세이 경찰관속으로 종이책 원도 이후진프레스 ★★★★★

 

후기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속으로'

책방익힘에 갔다가 발견한 책. 붙어있는 소개글에 혹해서 집어들었는데, 사길 잘했다.

산 사람, 죽은 사람, 남은 사람. 일반인의 눈으로, 경찰관의 눈으로 바라본 온갖 사람 이야기.

여전히 망나니같은 삶을 사는 범죄자,

시시비비를 가리는 택시기사와 승객,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업무중 사고로 인해 다치거나 순직하는 경찰관들.  

"사람 사는 것 다 똑같다"던 어른들의 말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무관심한 말이었는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살아보고 읽어보니 먹는 것, 사는 것, 일하는 것 다 달랐다.

겪어보지 못한 세계가 너무 넓더라. 

 

이걸 절감한 구절이 '강늡때기', '친절한 유서', '당신이라는 존재', '젊은 경찰관이여, 조국은 그대를 믿노라'였다.

강늡때기는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부모님이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

80평생 서류상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로 살아온 할머니다.

이름대신 '넙대대한얼굴'이라는 뜻의 강늡때기로 살아온 할머니의 눈물에 '다 똑같은' 삶이 있었을까.

세상을 살아가기엔 너무나 '소심'해서 자살한 이는 4장에 이르는 유서에

가족들이 앞으로의 일을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 빼곡히 써두었다.

소심하다기엔 친절하고 다정한 그의 죽음에 '다 똑같은' 삶이 있었을까.

한 베트남 여성은 아빠뻘 나이 남편에게 매일같이 맞았다. 작가의 도움으로 겨우 도망친 그.

결혼한 지 1년이 다되도록 한국어는 고사하고 죽도록 맞은 그의 아픔에 '다 똑같은' 삶이 있었을까.

사고현장을 수습하다가, 격한 업무에 시달리다가 과로로, 말이 안되는 민원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온갖 업무적 고충에 시달리다 순직한 일하는 경찰관들.

주어진 업무에 충실한 '일하는' 경찰관들의 초월적 업무에 '다 똑같은' 삶이 있었을까.

 

다양한 삶이 있었고, 이를 마음으로 도우려는 경찰관들이 있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에는 제약이 뒤따랐다.

우리가 쉽게 욕을 하는 경찰관들의 소극적인 태도 뒤에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제도가 있음을 다시금 상기하는 계기였다.

작가는 이를 외면할 것인지 끝까지 직시할 것인지에 대해서 독자에게 선택지를 남겨두었다.

"한 명의 인생을 망치는 건 한 사람으로 족하지만,

그 망가진 인생을구원하는 건 수많은 사람의 힘이 필요한 일이야."

직업을 떠나, 인종을 떠나, 성별을 떠나, 나이를 떠나 세상사는 사람 모두의 연대가 필요해지는 순간이다.
제도를 어떻게 고쳐야할지, 일반인인 내가 거기에 행할 수 있는 영향력은 무엇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우선은 이 이야기를 듣고 읽고 이 모든 삶을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언니'라고 불린 이상 이 언니는 힘 닿는 데까지 열심히 읽고, 기억하도록 하겠다. 

정말 좋은 책이었고, "가명을 사용함으로써 독자가 과연 누가 작가인지 궁금해하며,

한 번이라도 더 길 위의 경찰들을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는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당장 나부터도 길가다 경찰서 한 번, 경찰차 한 번, 순찰중인 경찰들 한 번 바라보게 될 듯 하다.

우선은, 쉽게 내뱉던 공무원 탓하기를 줄여나가야 겠다.

 

인상깊은 구절

1. 정말 웃기지. 난 몇 달 전 뉴욕 여행에서 음식 하나 주문하지 못했을 만큼 영어에 서툰데,

한국에서 1년 가까이 산 그 분과 한국말로 대화하는 것보다 영어로 대화하는 게 더 잘통한다는 것이.

 

2. 예전에 지나가는 택시를 향해 누군가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은 적이 있어. "천 원짜리 인생."

무심코 흘려들었던, 언제 들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도 않던 말이 왜 지금 생각나서 가슴에 사무치는 걸까.

4,000원짜리 자장면을 배달한다고 배달원이 4,000원짜리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며,

천 원짜리를 다룬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 전체가 천 원짜리 삶이 되는 것이 아닐텐데.

 

3. 이 상황에서 누가 짐승이고 누가 인간이야? 누가 인간이길 포기한 거지? 법에도 경중이 있듯이

목숨에도 무겁고 가벼운 게 있어서 인간보다 덩치가 작은 것의 죽음은 도통 무감각해지기로 작정한거야?

개새끼라는 욕은 없어져야 해. 개새끼보다 못한 인간이 차고 넘치는 세상에서 그런 욕은 더이상 무의미하니까.

 

4. 현장의 영웅을 원한다면 영웅이 마음 편히 활약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줘야 해.

맨땅의 헤딩으론 이마만 깨질 뿐이니까.

 

5. 누군가 쓰러져 죽어간 곳을 누군가 밟고 일어서며 오늘을 살아가는 곳이 바로 여기, 우리가 사는 세상이야.

 

6. 죽은 사람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죽은 사람의 심정을 헤아린다는 말 따위

산 사람의 오만함에 지나지 않아. 어떻게 해야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죽기로 결심한 사람을 이해한다며, 그 아픔 다 내려놓고 부디 좋은 곳에 가라는 명복을 빌어줄 수 있을까.

죽음은 슬픈 일이고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아직 살아있는 나는 그에 대한 발언권이 없는 것 같아.

 

7.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미뤄진 사회의 어둠은 생각보다 짙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아.

 

8. 민원인 이라는, 그들이 던진 말의 파편에 맞은 나는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지만 경찰이라는 이유로,

세금을 먹고 사는 직업이라는 이유로 아프다는 소리를 낼 자격조차 부여받지 못했어.

그들은 자신의 혀가 날카로운 칼인 줄도 모르고 나에게 휘둘렀고, 난 그 칼을 능숙하게 받아낼 실력도,

갖춰 입은 갑옷도 없어서 무척이나 많이 베였어.

 

9. 하나의 표정을 짓기엔 너무도 많은 감정을 느껴버린 나이. 그런 서글픈 표정의 노년이 지천에 널려있더라.

 

키워드: 경찰관, 언니, 강늡때기, 민들레 꽃, 천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