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독서기록

56. 아가미-20.05.03

독서의 흔적 2020. 5. 4. 15:08

한국소설 아가미 전자책 구병모 위즈덤하우스 ★★★★★

 

후기 '이토록 아픈데 왜 소리내어 우는 이 하나 없을까'

팬층이 두터운 작가들 중 한명인 구병모작가의 작품을 드디어 읽었다.

깊은 물속을 헤엄치다 나온듯한 축축함에 젖어들어 한참을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아가미>는 파스텔톤 수채화를 닮은 슬픔을 담고있다.

 

자살하려는 아버지의 팔에 안겨 물에 빠졌던 곤. 살기 위해서일까 그에겐 아가미와 비늘이 생겼다.

그런 그를 구해낸 할아버지와 강하. 강하의 친모는 그가 7살때 할아버지에게 떠맡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곤을 보호하고자 열변을 토해냈던 그였건만, 어찌된 일인지 '물고기새끼'라며 곤을 괴롭히는데에 도가 텄다.

사회의 혹독함에 시달리다 어느새 약물 중독이 되어버린 강하의 친모 이녕.

그녀의 환상은 날아오르는 물고기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핸드폰을 주우려다 물에 빠져 곤에게 구출된 해류. 오랜 투병끝에 떠난 엄마에게서 자유를 얻고, 곤을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저마다 상처받고 소외받은 이들이 곤을 중심으로 하나로 얽혀있다.

이들은 과연 곤과 어떤 관계를 맺었으며, 곤은 이들을 통해 어떻게 성장했을까?

곤은 사람들 틈에 섞여서 살아가게 될까, 아니면 본인의 몸에 맞게 물고기 틈에 섞여서 살아가게 될까?

 

<아가미>는 이들의 아픔을 다루고있음에도, 잔 물결처럼 차분하게 일렁인다.

그 위로 쏟아져 내리는 빛은 물결과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 여러조각으로 쪼개진다.

멀리서 바라보면 아름답다 느껴질듯한 찬란한 슬픔이다.

조금이라도 거친 언어를 쓰는 순간 바로 핏빛웅덩이로 변할텐데, 아슬한 선 위에서 그 경계를 잘 유지하고 있다.

곤의 조용함, 강하의 난폭함, 할아버지의 묵인, 친모의 환상, 해류의 포용

모든 것이 한데 뒤섞여 어느새 큰 강을 이루고 그 안에서 뒤엉켜 헤엄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읽는동안 아픔이란 이런 것일까 하는 저릿한 고통에 반응하는 심장의 거친 박동소리를 듣는다.   

긴 호흡을 유지하게 하는 섬세한 문체가 한 몫하는 듯 하다.

긴 문장을 하나씩 끊어가며 음미하다보면 어느새 눈앞에 곤이 훌쩍 다가온다.

귀 아래의 아가미가 열렸다 닫혔다하며 연신 물을 쏟아낸다.

'너는 아름다운 아이야...' 이녕의 말과, '물고기새끼'라는 강하의 두려움이 동시에 이해되는 순간이다.

강하의 난폭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그를 마냥 미워할 수 없음은 나 또한 미지의 생명체에는

낯선 거리감을 느낄 것이며 쉬이 다가가지 못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특히 강하의 심리를 묘사하는 해류의 화법이 마음에 들었다. 강하를 이해하는데에는 해류의 등장이 한 몫했다.

인간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 내 지론이지만, 강하의 행동은 그것을 뛰어넘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살아줬으면 하니까...'극한의 상황에서 만난 이들이 나눌 수 있었던 최선의 대화인 것일까.

곤이 찾고자하는 그것을 찾는게 나을지 못찾는게 나을지.. 아무리 고민해봐도 잘 모르겠다.

단지 곤이 더 이상 슬프지 않고 외롭지 않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다.

조금 과장해서 날이 잘 선 칼로 후벼파인 느낌이다. 아프긴 아픈데, 피는 나지 않는다.

그저 그 상처가 여기 있구나하고 어렴풋이 느껴지는 그런 느낌... 그냥... 그런 책이었다.
이 여운이 오래갈 것 같다. 아무도 자신이 아프다고 소리치지 않는 그 무게가 너무 슬펐다.

 

인상깊은 구절

1. 또다시 물에 빠진다면 인어 왕자를 두 번 만나는 행운이란 없을 테니 열심히 두 팔을 휘저어 나갈 거예요.

헤엄쳐야지 별수 있나요. 어쩌면 세상은 그 자체로 바닥없는 물이기도 하고.

 

2. 어떤 행동도 현재를 투영하거나 미래를 예측하지 않고 어떤 경우라도 과거가 반성의 대상이 되지 않으니

어느 순간에도 속하지 않는 삶이었다.

 

3. 살아 있는 건 언제 어디서라도 그걸 부르는 자에 의해 다른 이름을 가질 수 있었으며, 곤에게 의미 있는 건

그것을 뭐라고 부르는지가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오래도록 또는 눈부시게 살아 숨 쉬는지였다.

 

4. 엄마 아빠가 없다는 것은 그 어떤 성격이나 행위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없었다.

할아버지의 말마따나 강하가 만약 뾰족하다면, 다른 누구도 아닌 그것이 강하였다. 단지 그뿐인 일이었다.

 

5. 그건 완성시키지 못한 이미지를 제 손으로 부순 자의, 끝까지 읽지 못한 책을 결국 덮어버리고 반납한 뒤

두 번 다시는 대출하지 못하게 돼버린 이의 표정에 가까웠어요.

 

6. "그래도 살아줬으면 좋겠으니까." 살아줬으면 좋겠다니! 곤은 지금껏 자신이 들어본 말 중에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예쁘다'가 지금 이 말에 비하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폭포처럼 와락 깨달았다.

 

7. 당신을 무사히 떠나보내기 위한 어떤...에너지의 흐름 같은게 있지 않았겠나 싶었죠. 이심전심?

호수를 옆에 끼고 살아온 사람들. 물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게 아닐까. 모든 물질의 응집력은 수분을 전제로 하잖아요.

 

8.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매 순간 흔들리고 기울어지는 물 위의 뗏목같아요.

그 불안정함과 막막함이야말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 아닐까요.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확신할 수 있는 단 한가지는, 이 마음과 앞으로의 운명에 확신이라곤

없다는 사실뿐이지 않을까요. 강하와 할아버지만이, 그리고 막판에 이녕 씨만이 둘러싼 세상의 전부였던 당신에게,

이것은 선뜻 이해가 가는 말이 아닐 수도 있겠어요.

 

9. 강하는 그 이름을 일상적으로 부르는 것조차 두려웠던 거예요. 한 번 제대로 마주한 적 없는 존재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 한 음절이 혈관을 부풀어 오르게 하고 마침내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

 

10. 엄마, 내가 인어를 봤다니까? 그 아저씨는 분명 바다 깊이 궁전에 사는 인어 왕자님일 거야.

그런데 마녀가 준 약을 먹고 두 다리가 생긴 거지. 인어 왕자님은 누구를 위해 다리를 얻은 걸까?

그러면 역시 언젠가는 물거품이 되어서 아침 햇살에 부서져버릴까?

 

키워드: 아가미, 물고기, 호수, 바다, 비늘, 인어왕자, 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