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독서기록

44. 세상 끝 동물원-20.04.22~04.24

독서의 흔적 2020. 4. 24. 18:30

영미소설

세상 끝

동물원

전자책

어피니티

코나

유현경 문학동네 ★★★★★

 

후기 '양귀비 봉오리가 피어나지 않기를'

절망 속에서 피어난 희망의 끝자락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나.

어린 아이의 시점에서 쓰인 책이기에 이 끔찍한 비극은 어떤 포장도 없이 순수하게 전개된다.

이 책의 슬프고 침통한 부분은 이것이 실화를 바탕으로 쓰인 책이라는사실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삶이, 고통이, 눈물이, 피가 책장을 넘어 내 온 몸으로 스며들어온다.

731부대와 견줄만큼 잔혹함과 비인간적인 행위로 기록된 이 사건의 더욱 슬픈 부분은,

실험 대상이었던 1500쌍의 쌍둥이 중 결국 살아남은 것은 100쌍임에도

정작 주모자인 요제프 멩겔스는 나름 평온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점이다.

후기를 쓰기 위해 그의 행적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멩겔스의 비인간적인 시술이 아닌 피해자들의 고통과 삶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묘사한 작가에게 감사를 전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책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쉽게 상상하기 힘든 잔인한 고통을 받은 생존자가 결국 용서를 택했다는 것을 보며,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용서이고 가장 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용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모자들의 반성여부와 관계없이, 생존자들은 용서를 통해 비로소 온전한 자신을 되찾았을 것이다.

자신을 향한 행위들에 대한 분노를 넘어선 용서.

그 엄숙한 인간적인 모습에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다.

<"다시 해보자." 나는 그 문장을 끝맺을 필요가 없었다.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우리는 다시 한 번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22장 결코 끝이 아닌 중>
펄과 스타샤가 앙 다문 양귀비 봉오리를 그렸을 때,

비로소 죽음이라는 침묵이 멎고 미래라는 시곗바늘이 움직였으리라.

그들 눈에 비친 미래는 사랑과 빛으로 가득한 세상이었기를 간절히 바란다.

 

인상깊은 구절

1. 나는 생명체로서,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다운 사람으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때로는 자신을 사물처럼 다룰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자신을 숨기고 있다가 안전할 때 되돌려놓아야 한다고. 하지만 다른 질문으로 그 말을 삼켰다.

 

2. 막사에서 제일 먼저 할 일은 다른 아이들의 이름을 파악하는 것이다. 서로의 이름을 모두 외워라.

새로운 아이가 오면 그 이름도 알아둬. 어떤 아이가 우리를 떠나면 그 이름을 기억해라.

 

3. 밤, 그것은 아우슈비츠에서 아름다워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심부름꾼 소년의 등뒤에서 벨벳 같은 밤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4. 사랑하는 이 악당에게 누가 어떤 말을 하든 우리 모두 브루나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진정한 재능은 도둑질이 아니었다. 약속, 그것이 브루나의 진짜 재능이었다. 자신의 현재가 파괴에 바쳐졌음에도

이행과 창조를 꿈꿀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5. 훌륭한 의사였던 아빠가 사지와 손가락과 발가락을 잃은 사람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잃어버린 부위에 통증이나 간지럼을

계속 느낀다고, 심한 경우에는 살점 하나 잃은 적 없는 것처럼 느낀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런 일을 겪을 수도 있다고 주의를 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6. 나의 용서는 한없는 반복이었고,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일이었다.

나는 그들의 실험이, 그들이 부여한 번호가, 그들이 채취한 샘플이 헛된 것임을 증명하며, 한 소녀가 얼마만큼 견딜 수 있는지에

대해 그들이 과소평가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였다. 나의 용서로, 나를 없애려 한 그들의 실패는 확실해졌다.

 

7. 기억보다 구멍이 낫지. 그녀가 말했다. 나는 이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미리는 누구보다도 잊어야 할 게 많은 사람이었고,

기억을 쳐내서 마음에 커다란 빈 공간을 만드는 편이 나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가 망각을 추구하더라도 나에 대한 작은

기억만은 남겨주기를 바랐다. 아주 자그마한 기억이라도, 그래서 우리가 진짜로 헤어지더라도 언젠가는 나를 찾아낼 수 있도록.

 

8. 친절함을 타고났지만 고난의 역풍을 맞은 연약함은 용기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미리는 고통이 무엇인지 알았고 그럼에도 회복에 대해 알고 싶어했다.

 

9. 자신의 가장 훌륭한 부분이 지척에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너무도 많은 헤어짐 후에, 영영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거리에 말이다. 그런 경험이 있다면 그 순간의 환희도 잘 알 것이다. 내 심장은 재회의 기쁨으로 전율했고 혀는 행복으로 마비되었다.

비장이 양쪽 폐한테 너희가 내기에서 졌다고 말했다. 내가 뭐랬어! 비장이 말했다. 그리고 생각들은, 나의 장밋빛 생각들은

내가 오랫동안 잃어버렸다고 믿고 살았던 미래를 향해 뻗어가고 있었다.

 

키워드 : 아우슈비츠, 쌍둥이, 요제프 멩겔스, 생체실험, 양귀비, 희망, 미래, 유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