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한 명-20.11.07
한국소설 | 한 명 | 종이책 | 김 숨 | 현대문학 | ★★★★★ |
후기 "'한 명'이 '한 명들'이 될 때 기억은 역사가 된다."
부러 <흐르는 편지> → <한 명> 순으로 읽었다.
글을 몰라, 물가에 가만히 흘려보내던 마음을 기억한다.
그리고 쉰이 되어서야 글을 깨우친, 아흔 셋의 풍길을 만났다.
'한 명'을 만나러 가기 위해 고운 봄 가디건을 꺼내입고, '한 명들'이 되기 위해 나서는 떨리는 발걸음을 기억 속에 고이 새겨본다.
"죽을 수가 없어. 내가 죽으면 말할 사람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
'위안부' 피해 생존자가 한 명뿐인 가상의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소설은 주인공(풍길)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되지만, 아흔 셋 인생 곳곳엔 '위안부'피해 생존자 수십명의 목소리가 녹아있다.
"나는 위안부가 아니야", "죽기 전까지 행복하게 살고 싶어"
316개에 달하는 각주는 그들의 몸에 아로새겨진 역사였고 과거이자 현재였다.
차마 믿을 수 없어 외면하고 싶은 증언들이 풍길의 목소리가, 아흔 셋 인생이 되었다.
7년이었다. 열세 살의 나이에 끌려간 후 만주 막사에 갇혀 있었던 시간이.
70명이었다. 하루 사이에 풍길의 몸에 다녀간 일본 군인의 숫자가.
20만명이 끌려갔다가 겨우 2만명이 돌아왔다고 했다.
김학순 생존자가 "나는 '위안부' 생존자다"고 외치자, 여기저기서 "나도 피해자요."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2만명에서 238명, 47명, 그리고 16명...
힘겹게 터져나온 목소리는 하나 둘 사라지고 어느새 16명의 생존자만 남았다.
"'한 명'의 살아있음, 그것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이 책에 기록된 역사가 아닌
누군가의 삶 속에서 온전히 현재형의 역사로 살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박혜경 해설)
"위안부는 돈을 많이 벌었다", "증거가 없다."며 진정성을 의심하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내가 바로 증거다." 김학순 생존자는 온 몸을 감싸둔 옷을 하나 둘 벗고 속옷을 들어올렸다.
수많은 흔적들이 증거였다. 현재를 살아가는 과거의 잔재였다.
모두들 평화로운 세상을 말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그들에게 전쟁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아이를 가졌더니 주사를 맞혀서 낙태시켰다.
"얼굴이 반반하니 아직 쓸만하다"며, 아이를 자궁 채 떼어냈다.
흥분한 장교가 총을 쏴, 총알이 자궁을 뚫고 나갔다.
힘겹게 가진 아이는 매독의 영향으로 마흔넘어 정신병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꼭 한 번 여자로 다시 태어나고싶다"는 윤두리 생존자를 떠올려본다.
행복하게 살고싶다는 목소리가, 죽을 수가 없다는 목소리가 손 끝을 툭툭 건드린다.
목숨걸고 귀환했을 때 온 마을이, 온 가족이, 국가가 그들을 손가락질 했다.
꽁꽁 숨겨왔던 과거가 어떻게 들켰는지 함께 지내던 이들이 하나 둘 떠나갔다.
용기내어 증언했더니, 가족도 친구도 멀어졌다. 낙인이 찍혔다.
"'위안부' 피해 사실을 알고도 남아있는 친구가 진짜 친구요."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이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게 만드는 것은 누구인가.
국가는 일을 키우면 양국간 사이가 나빠진다며 표면적으로만 수습하기에 급급했다.
언론은 피해자들이 겪은 '피해 사실'에 방점을 찍어 더욱 자극적인 보도에만 열을 올렸다.
마치 소유물을 약탈당한 듯이 당사자를 지운 채 정치적으로 소모하는 것은 누구인가.
'나'로 살아보지 못한 이들의 절절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니었던 그 시절이 내 기억이 되어버린 그들이 외친다.
"나는 윤금실이야. 역사의 산증인 윤금실이야."
한 명의 기억이 기록이 되어 또다른 한 명을 만날 때, 비로소 기억은 모두의 역사가 된다.
역사가 되기를 택한 238명의 목소리. 그리고 여기, 한 명이 된 20만명의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다.
인상깊은 구절
1. 위안소에 있을 때 그녀는 몸뚱이가 하나인 것이 가장 원망스러웠다.
하나인 몸뚱이를 두고 스무 명이, 서른 명이 진딧물이처럼 달려들었다. 하나인 그 몸뚱이도 그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자신의 것이 아니던 몸뚱이를 부려 그녀는 이제껏 살아왔다.
2. 헌병 하나가 나보고 몇 살이냐고 묻더라. 내 얼굴이 애기 얼굴처럼 동글동글하니까... 열세 살이라고 하니까 헌병이 웃더라.
3. 소녀들은 자신들 몸에 다녀가는 군인들 명수로 일요일인지 알았다. 그곳에는 달력도 없어서 소녀들은 날짜도, 요일도 몰랐다.
모든 날들은, 모르는 날들이었다. 모르는 날들이 흘러가는 동안 소녀들은 폭삭 늙었다.
4. 만주 위안소에 있던 7년 동안 그녀의 몸에 다녀간 일본 군인은 어림잡아 3만 명이었다.
3만 명에 달하는 군인 중 그녀에게 그렇게 말해준 군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죽지 말라고, 어떻게든 살아서 조선에 돌아가라고.
5. 신에게 소원을 빈다면 그녀는 하나만 빌 것이다. 고향 마을 강가로 자신을 데려다 달라고. 열세 살 그때로.
인간이 마침내 달나라에 가게 되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그녀는 속으로 비웃었다. 과학이 발달해 인간을 달나라에
보내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녀를 고향 마을 강가에 도로 데려다놓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녀의 고향 마을 강은 달보다 더 먼 곳에서 흐르고 있었다.
키워드: '위안부', 만주 막사, 한 명, 20만명 중 2만명, 열세 살, 까치, 양옥집
꼬리(연결고리): 흐르는 편지
-'위안부' 피해자 일인칭 시점의 소설. 배에 품은 일본군 아기를 향한 심리변화가 돋보인다.
물가에 흘려보낸 편지는 가족에게 가 닿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