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독서기록

143. 세계의 호수

독서의 흔적 2020. 9. 11. 16:43

한국소설 세계의 호수 전자책 정용준 arte ★★★★☆

 

후기 '모든 진심에는 때가 있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외로움을 잊기 위해서, 상대방을 알기 위해서는 대화가 필요하다.

대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므로, 대화가 단절된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고, 그것은 말과 대화도 마찬가지이다.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마음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같을 수 없기에, 상대방의 마음을 짐작하고 헤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내 마음을 알아주기 바라는 것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행위이다.

여기, 서로간에 대화가 단절되고, 자연스럽게 이별의 수순을 밟은 한 연인이 있다.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해 미련이 남은 남자(윤기), 낯선 땅에서 중심을 잃고 헤매는 여자(무주).

과거에 연인이었던 두사람은 7년 후, 대화를 통해 각자의 자리를 찾아간다.

맺고 끊음이 불분명한 이별은 수다스럽다. 왜 헤어졌을까.”, “그땐 좋았는데.”, “이렇게 헤어질 순 없어.”

정리하지 못한 마음은 미련과 후회로 구구절절 어찌나 말이 많은지.

낯선 곳에서의 붕뜬 마음을 빌려, 깊숙한 곳에 숨겨져있던 진심이 스멀스멀 비져나온다.

한번 뱉은 말은 주워담을새 없이 폭포처럼 쏟아내린다.

그리움과 미련 사이로 서로를 향한 날선 말들이 하나둘 튀어나온다.

케케묵은 진심은 그런 것이다. 하지못한 말들이 해서는 안되는 말과 뒤엉켜 상대방을 향한 칼날이,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사랑하지만 더 이상 사랑받는 느낌이 없어 외로움에 시달리다 연인을 떠난 무주.

쌓여있는 많은 일들을 처리하느라 사랑표현을 미루고 미루다 연인이 떠나간 윤기.

사랑을 확인하고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관계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때로는 상황이 진심을 압도하는 법이다. 무주의 곁에는 이제 사랑하는 남편이, 그리고 딸이 있다.

그에게 있어서 윤기의 존재는 낯선 땅으로 도망쳐 외면하고 싶었던 옛사랑,

이제는 웃으며 맞이할 수 있는 정리된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

미련과 후회로 가득한 윤기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둘.

미처 전하지 못햇던 진심을 말하던지, 말하지 않고 행복을 빌어주며 떠나가던지.

여행지의 사건을 삶으로 끌고 오지 마세요. 복잡해진답니다.”

윤기는 이 모든 사건을, 시간을, 감정을 어떻게 정리할까. 이 관계의 끝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세계의 호수-세 개의 호수.

그러니까 이것은 만남과 사랑, 이별에 있어 소통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구질구질하고 투명한 미련 이야기.

 

인상깊은 구절

1. 38년 동안 살면서 깨닫게 된 몇 안 되는 진리 중 하나. 잘 모르는 이가 편을 들어주고 마음을 헤아려주는 말을 하면

경계해야 한다. 그렇죠. 내 말이 그 말이에요, 라고 속에 있는 말을 순진하게 꺼내면 그 말은 빠르게 주위를 돌아다니며

와전되고 나쁘게 이용된다.

 

2. 잘하셨어요. 여행지에서 뭔가를 결정하는 용기는 항상 옳아요. 하지만 그 용기는 한 번만 내세요. 그곳에선 뭔가를

결정하면 안 돼요. 그건 용기가 아니에요. 어리석은 거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멍하게 있는 내게 민영 씨는

다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행지의 사건을 삶으로 끌고오지 마세요. 복잡해진답니다.

 

3. 항상 무주를 생각했다. 생각하려 하지 않았고 가능하면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생각이 났다.

어느 순간부터 무주는 '오늘의 날씨'처럼 일상에 영향을 줬다.

 

4. 무주의 감정은 깨끗하게 닦아 선반에 올려놓은 그릇 같았다. 불 같고 물 같고 때론 동물 같았던 무주의 감정이

정물처럼 느껴지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야만 한다고도 생각했는데, 막상 그것을

마주한 마음은 서글펐다. 내 표정은 어떨까. 내가 무주에게 느끼듯 무주도 그렇게 느끼는 것일까.

 

5. 너와 있으면 항상 척력이 느껴졌어. 멀리 있을 땐 인력이 느껴졌는데 가까워지면 더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밀어내는 힘이 느껴졌어. 바로 곁이 아닌 적당한 거리에 나를 두고 사랑하냐고 묻는 내 말에 너는 아무 감정도

없이 기계처럼 말하곤 했지. 알면서 그래. 그러면서 너는 사람의 마음을 너무 잘 아는 듯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고

시나리오를 썼어. 읽을 때마다 얼마나 섬뜩했는지 알아? 이렇게 사람의 내면을 잘 들여다보는 사람이 연인의 마음을

모른다고? 아니. 넌 알았어. 알면서 이 상태를 방치하고 있었던 거야. 비겁한 새끼.

 

6. 아,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넌 핵심 장면에서 해야 할 말을 못 하고 있어. 그 말을 안 하면서 빙빙 돌리고만 있잖아.

사실을 쓸 필요는 없만 진심은 말해야지. 쓰지 않으면 읽어낼 방법이 없어. 말을 멈추고 음, 소리를 내며 무주는 말을

골랐다. 그냥 써. 걱정 말고.

 

키워드: 여행, 호수, 언어, 번역, 말, 소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