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역병의 바다-20.08.16

| 한국소설 | 역병의 바다 | 종이책 | 김보영 | 알마 | ★★★★★ |
후기 '주변 모든 것을 의심하게 만드는 공포'
김보영 작가님 자첫(!)을 무슨 작품으로 할지 고민하다가 <역병의 바다>를 택했다.
소금기가 발바닥에 쩍쩍 들러붙는 해안가를 늘상 거닌다.
콧속을 간질이는 짭짤한 냄새와 비릿한 바다냄새를 매일 맡는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새카만 바다를 뚫어져라 보고있으면, 물결에 몸을 맡기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끈적하고, 쿰쿰하고, 퀴퀴한. 익히 알고 있는 공포.
우연의 일치일까. 전세계적으로 코로나가 극성인 가운데, 이 책이 출간되었다.
자연스럽게 등장인물들의 행동에 현실 사람들을 덧대어 보게됐다.
그러다보니 우진과 마을 사람들이 괴인을 대하는 태도가 왜 이렇게 차이나는지 궁금했다.
괴인의 외양을 두고 누군가는 '가족'을 발견하고, 누군가는 혐오를 표하며 '괴물'을 찾는다. 어째서일까.
<크툴루의 부름>과 <인스머스의 그림자>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고백하자면, 러브크래프트의 원작은 가독성이 좋은지 모르겠더라..)
아는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당사자성과 타자성, 지식의 유무에 따른 차이였다.
감염학 연구원인 동시에 '타자'인 우진은 실존하는 공포 그 너머의 미래를 상상한다.
짧은 순간에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미래까지 예측하는 그의 지성은 가히 놀랍다.
하지만 그런만큼 꽉 막힌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괴인이나 감염자를 두고 ‘괴물’이라고 외치는 것이 예다.
반면 마을사람들은 피해중심에 선 당사자였으며,
지리적 폐쇄성과 전염병 확산을 막기위한 지역봉쇄로 인한 정보단절은 이들의 공포를 축소시키는데 한 몫 했다.
이들은 괴인과 감염자를 쉬이 받아들인다. 재난상황에서 사고능력이 마비된 탓도 있겠지만,
집단사회에서 배제당하는 상황을 두려워한 나머지 새로운 집단을 생성하려고 한 것일 수도 있겠다.
감염병 예방차원에서의 정보공유가 활발히 이뤄졌다면, 이 요상한 공존이 지속될 수 있었을까.
(코로나 감염자들의 이동경로가 공개될 때마다 비난이 속출하는 것을 보면, 위 가정의 결과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우진과 마을사람의 팽팽한 갈등 가운데, 외지인이자 피해자인 무영의 '아슬아슬한 공포 줄타기'가 부각된다.
무영은 현이(조카)와 재회한 전후를 기점으로, 괴인을 대하는 태도에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관광객인 타자성을 감염자 조카를 둔 피해자의 당사자성이 억누른 것이다.
그렇기에 우진이 분석한 정보를 습득하고도 마을사람들에게 그를 잡아들이라고 조언할 수 있었다.
무영은 작품 내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을만큼 변화의 폭이 컸다.
무영이 택한 결말(스포방지)은 공포로 인한 자멸이었을까, 공포를 억누른 분노였을까.
탈출에 성공한 우진은 미쳐버린 것일까 지극히 정상인 것일까.
확실한 것은 미지의 생명체가 이 모든 상황을 은폐하는데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들의 손길이 어디까지 미쳤을지 아무도 모른다.
흐르는 물은 바다로 향하고, 바다는 모든 것과 연결되어있기에.
내내 우진의 행동이 무엇과 닮아서 더욱 끔찍하게 느껴졌다.
우진의 혐오를 정당화 하고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의 말에 단 1g의 진실도 없었을까?
'가장 위험한 거짓은 진실이 약간 왜곡되는 것이다.'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은 우진일까, 마을 사람들일까. 내가 작품 속에서 보고 들은 것은 진실일까 거짓일까.
이야기를 열심히 뒤쫓아왔건만, 생각할수록 혼란스럽기만 하다. 나도 공포에 전염된듯 하다.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던 황희정승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의심하게 만드는, 원초적인 공포를 건드리는 작품이다.
+) 러브크래프트가 차별적인 시선을 가진 작가라고 들었는데, 읽어보니 과연...
훌륭한 차별주의자다. 원작에서 주체였던 '엘리트 남성'이 이곳에선 편지만 줄창 쓰는 주변인으로 등장하는게 짜릿했다.
이주배경가정 2세인 윤희와 경호원 무영. 사회적 약자인 두 여성이 사건의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단점은 보완하고 장점은 부각한 아주 멋진 오마주였다.
인상깊은 구절
1. 그 무시무시한 악담으로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은 하나뿐이다. '내게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바람을 넘어 기도에 가까운의식. 무자비한 말로 인간을 난자하면서 속내에서는 바라마지 않는 것이다.
'내게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그 기저에 있는 것은 두려움...
하루하루 내딛는 걸음마다 살 떨리도록 심장을 비틀어 옥죄어오는 처참한 두려움.
2. 이 마을 주민들은 추해졌어요. 하지만 추함은 악과 관계가 없어요. 둘은 서로 빗댈 것이 아니에요.
3. 현이는 마지막까지 나를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 나도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다. 현이는 많이 울지도 않았다.
마치 고작 이 별것 아닌 잠깐의 움직임 하나를 위해서 지금까지 그 고단한 생을 유지해왔다고 말하는 것처럼.
내 아이는 어디서 죽음을 배웠을까. 생이 어느 날 끝나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에게서 배웠을까.
키워드: 러브크래프트, 크툴루신화, 역병, 괴인, 해저 화산 폭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