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독서기록

120. 아무튼, 떡볶이-20.08.09

독서의 흔적 2020. 8. 10. 15:29

에세이 아무튼, 떡볶이 전자책 요조 위고 ★★★★★

 

후기 '떡볶이는 죄가 없다'

잠들기 전에 조금만 읽으려다가 결국 다 읽어버렸다.

아는 맛이 제일 힘든 법인지라, 책장 한 장에 침 꿀꺽 한번씩 아주 리듬감있게 읽었다.

예상했지만 새벽에 읽기엔 위장에 해로운 책이었다.

떡볶이와 얽힌 인연이 생각나서 괴롭기도 했으니, 정신에도 해로웠고요...?

그래도 그때 먹은 후추맛 가득한 대구 떡볶이는 잊지 못한다.

(어딜가도 그 맛이 느껴지지 않던데, 문제는 상호명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떡볶이 먹고 배탈나서 나를 바람맞힌 친구도 있었지만, 떡볶이는 죄가 없다. 죄는 사람한테 있지. , 그렇고 말고.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다 좋아한다'는 요조 작가의 오만 없는 좋아함에 저도 한 표 던져봅니다.

그게 왜 그렇게 좋냐고 묻거든 그냥이라고 답하겠다.

퉁퉁 불은 떡도, 양념이 덜 밴 싱거운 떡도, 쌀떡도 밀떡도.

그냥 떡볶이라서 좋고, 내가 좋아하는 '어떤 것'이라서 좋다.

때로는 종류도 이유도 따지지 않는 호불호의 영역이 필요하다.

밤 깊은 새벽에 노곤노곤한 상태로 책을 읽고 있으려니, 책장 너머로 따끈하고 말랑몽당한 떡의 온기가 전해지는 것 같다.

아무튼 술-아무튼 떡볶이 이렇게 읽으니, 떡볶이 옆에 오징어, 김말이, 고추튀김 쌓아놓고

냉동실에서 꺼낸 맥주 한캔 쭈욱 들이켜고 싶다. 아무튼, 내일은 떡볶이다.

(안타깝게도 아직까지도 떡볶이를 먹지 못했다. 내일은 기필코 먹고말리라.)

아무튼 시리즈는 읽고나면 늘 해당 분야와 관련된 일화들이 생각난다.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있지만, 이렇게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는 매개체가 존재한다는 것이 너무 즐겁다.

나도 나만의 아무튼, 을 써볼까 싶다.

바라건데 작가의 아무튼, 연애를 꼭 볼 수 있기를.

 

인상깊은 구절

1. 작은 인간의 눈동자와 입술과 손가락을 보면서 나는 귀여움의 공포에 대해서 생각했다.

나는 진짜 무서운 것은 귀여움이라고 생각한다. 그걸 이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악마가 시커멓고 꼬리가 길고 눈알이 빨갛고 이빨이 뾰족하기 때문에 세상이 아직 안전한 것이다.

제하같은 애가 악마였다면 세상은 진즉에 끝났어,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2. "기사님, 부산역이요, 빨리 가주세요"하고 외치는 이혜연의 옆모습을 바라보면서 이혜연과 '부산 이혜연'

이라면, 같은 영혼을 가진 이 두사람이라면 연락처 따위 몰라도 얼마든지 만나는 게 가능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3. 동네는 내가 민망하다고 우습게 여겼던 종교 없는 사람들이 흉내내는 기도 같았다.

소꿉장난처럼 작았고, 깨끗했고, 불행은 없었고, 가짜 음식을 맛있게 냠냠 먹는 척을 하면서 마냥 곁에 서 있고 싶은 그런 동네였다.

 

4. 꽃나무가 주는 향기를 맡는 일은 나에게 간단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꽃나무는 가까이 다가온다고 해서 향을 더 나눠주는 존재들이

아니다. 어떤때에는 바로 곁을 지나도 아무 냄새도 나지 않을 때도 있고, 어떤 때에는 제법 멀리 떨어져 있어도 향기를 맡을 수 있다.

모든 것은 그 나무의 컨디션과, 그날의 바람과 온도, 그리고 하필 그 순간의 내 호흡이 맞아떨어지는 아주 찰나에 좌우된다.

길을 걷다가 꽃나무 향기를 맡는 것도 나에게는 큰 횡재인 것이다.

 

5. 맛없는 떡볶이집이라도 존재하는 것이 나는 좋다. 대체로 모든 게 그렇다. 뭐가 되었든 그닥 훌륭하지 않더라도 어쩌다 존재하게

되었으면 가능한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내가 이 세상에 사십 년 가까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안심이다.

그것은 내가 나를 너무 사랑해서라거나 내가 이 세상에 쓸모 있는 존재라고 여겨져서가 아니라 어쨌거나 백기녀와 신중택의

젊은 날 뜨거운 밤을 통해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내가 존재하게 되어버렸으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래오래 살아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6. 우리의 관계 안에는 구심이 있었다. 그 하나의 구심 때문에 점점 멀어지는 각자의 삶 속에서 서로를 점점 몰라가면서도

태연하게 상대방을 가장 오래된 친구라고, 나를 가장 잘 아는 친구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그 구심은 떡볶이집이다.

 

7. 물론 나는 호구가 아니다. 떡볶이로 부탁하기에 덩치가 큰 부탁으로 여겨지는 경우 나는 상대에게

진지하게 반문한다. 몇 번 사줄 건지.

 

8. 의미와 무의미는 정말이지 뫼비우스의 띠 같다. 경계를 도무지 나눈 수가 없다. 무의미한가 싶으면 의미하고 의미한가 싶으면

무의미하다. 제하(달리는 콘치즈박사)에게 완벽하게 무의미해진 공룡들이 제하(달리는 공룡박사)의 어린 시절을 증거하는

의미인 것처럼. 의미에 집착하는 의미 중독자라고 나를 설명하지만 정작 내가 아침마다 경험하는 것은 생의 무의미함인 것처럼.

 

9. 다 좋아한다는 말의 평화로움은 지루하다. 다 좋아한다는 말은 그 빈틈없는 선의에도 불구하고 듣는 사람을 자주 짜증나게 한다.

또한 다 좋아한다는 말은 하나하나 대조하고 비교해가며 기어이 베스트를 가려내는 일이 사실은 귀찮다는 속내가 은은하게 드러나는

제법 게으른 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오만없는 좋아함에 그닥 불만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다 좋아한다'라는 말에 진심으로 임하지 않았다면 이 책도 이렇게 묶이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10. 아마도 나에게 있어 이 책의 최고의 리뷰는 이 책을 읽고 난 당신의 바로 다음 끼니가 떡볶이가 되는 일일 것이다.

 

키워드: 떡볶이, 미미네, 떡볶이 카페, 영스넥, 비건, 코펜하겐 떡볶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