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보건교사 안은영-20.07.11
한국소설 | 보건교사 안은영 | 종이책 | 정세랑 | 민음사 | ★★★★★ |
후기 '흐릿한 이들이 서로를 만나 뚜렷해지는 순간들'
이래저래 쳐내고나니 남는 책이 몇 권 없더라. (창비, 문동 및 계열사 제외)
슬펐다. 이런 와중에도 현실도피는 책으로 하게된다.
본디 글이라는 것은, 아무리 잘 감추고 가공하여도 작가의 본질이 스며들게 되어있다.
보건교사 안은영을 중심으로 개개인의 이야기가 모여 한 그루의 단단한 나무가 되었다.
곧게 뻗은 잔가지들은 성소수자, 인천 라이브 호프 화재 사망자, 학급왕따 등 소외받는 이들에게 가 닿았다.
퇴마는 연결고리를 만드는 도구일 뿐이고,
은영이 능력을 펼치며 충실하게 살아가다보니 사람도 구하고 사랑도 구하더라는 이야기이다.
모난 시선 하나 없이, 따스함과 다정함이 한데 모여 흘러넘치는 책.
퇴마사와 한문선생의 사랑이라니 최고의 궁합이 아닐리 없다.
한문선생인 홍인표가 한시로 부적을 쓸 때, ‘이래서 인표가 한문선생이군. 주인공을 위한 완벽한 조력자다.’ 싶었다.
"니가 안 만나 줬잖아" 하는 인표의 외침이 어찌나 솔직담백하던지.
"왜겠어요(돌이킬 수 있는-문목하)",
"이 멍텅구리야, 넌 태어난지 3분이 한참 지났는데도 갑문이 아름다운 줄은 모르지(유령해마-문목하)",
"이제 알약 삼킬 줄 아니(파과-구병모)"가 생각나는 문장이었다.
무심한듯 툭툭 내뱉는 진심이 직구로 날아와, 심장에 찌르르한 통증을 주는 그 순간을 좋아한다.
강선에서 은표로 이어지는 시선 또한 인상적이었다.
강선이 쥐어준 깔때기 칼과 비비탄 총 그리고 슬레이어즈 그림.
“장르를 잘못 택했단 말야. 칙칙한 호러물이 아니라 마구달리는 소년 만화여야 했다고.”
흐릿했던 은영과 강선이 서로의 장점을 이끌어내며 선명해지던 그 순간.
깔때기 칼과 비비탄 총을 쥔 은영의 손을 은표가 마주잡으면 힘이 증축되던,
무미건조한 은영의 일상에 은표라는 거대한 힘의 장벽이 더해지던 그 순간.
상처를 지닌 이들이 서로를 보듬는 만남. 은영을 확실한 존재로 만드는 만남.
사소했던 일상을 파고드는 순간의 특별함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부분을 확실하게 좋아한다고 표현 할 수 있는 이 작품, 너무나 소중하고 귀하다.
정세랑 작가 특유의 ‘울림 말’이 있다고들 하는데, <보건교사 안은영>에서도 몇가지 발견할 수 있었다.
"뒤에 오는 이들은 언제나 더 똑똑해. 이 아이들이라면 우리보다 훨씬 나을거야."
아이들의 세상이 훨씬 나아질 수 있게 지치지 말고 잘 버텨야겠구나, 다짐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그리고 소설의 말미를 장식하는 대망의 문장.
"그 빛나는 얼굴이 인표의 수면등이었다."
침침하던 머릿속이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내게는 <보건교사 안은영>이 다사다난했던 한 주의 수면등이었다.
험난한 세상에 한줄기 빛과 같은 작가.
냉정하고 난폭한 일상에서 이토록 따스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행복한 시간이었다.
+) 백혜민, 박대흥, 김래디 좋은 이야기와 인물들 한가득이지만 더 언급하다보면 길어질 듯 하니, 이만...
인상깊은 구절
1. 정현이 아파했더라면, 혹 정현이 한 사람에게라도 해를 끼쳤다면 예전에 정현을 분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현은 너무나 무해했다. 격하게 몸부림치며 부서지는 죽음도 있는가 하면
정현처럼 비누장미같이 오래 거기 있는 죽음도 있는 것이다.
2.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엔 야경이 소원처럼, 사랑처럼, 약속처럼 빛났다.
언젠가는 소원을 훔치는 쪽이 아니라 비는 쪽이 되고 싶다고, 은영이 차창에 이마를 대고 밖을 내다보며 생각했다.
3. 폭력적인 죽음의 흔적들은 너무나 오래 남았다.
어린 은영은 살아간다는 것이 결국 지독하게 폭력적인 세계와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가끔은 피할 수 없이 다치는 일이란 걸 천천히 깨닫고 있었다.
4. 강선과의 대화는 언제나 은영이 조금 바보가 되어 끝났다.
더 바보가 되어도 좋으니 가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5. 선생님들의 성대모사를 들으며 혜민은 부끄러워서 기절하고 싶었다.
되면 되지, 이제부터 하면 되지 하고 응원받았지만 마음이 조급해졌다.
살아간다는 거 마음이 조급해지는 거구나. 욕심이 나는 거구나.
얼떨떨한 상태에서 오래된 옴잡이의 마음이 점점 어려졌다.
6. “있잖아, 다음 선거에는 너희들한테도 선거권이 있어.”
대흥의 설명을, 어른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세계를 특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생에게는
끄트머리에 그렇게 덧붙여 주기도 했는데 그러면 아이의 눈 안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대흥은 그 반짝임 때문에 늘 희망을 얻었다.
7. 어차피 언젠가는 지게 되어 있어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어떻게 계속 이겨요.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함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져도 괜찮아요. 그게 이번이라도 괜찮아요.
8. 서로의 흉터에 입을 맞추고 사는 삶은 삶의 다른 나쁜 조건들을 잊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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