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칵테일, 러브, 좀비-20.07.02
한국소설 | 칵테일, 러브, 좀비 | 전자책 | 조예은 | 안전가옥 | ★★★★★ |
후기 '다채로운 비극의 향연'
조예은 작가님 글은 신기하다.
분명 진흙탕(이른바 총체적 난국)인데, 형형색색의 빛을 뽐내고 있다.
전작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이 <파프리카>같았다면, 이번 <칵테일, 러브, 좀비>는 <컬러풀>을 떠올리게 한다.
1. 초대
가스라이팅. 이른바 심리적 지배가 한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여준다.
주인공의 정신적 고통을 목에 박힌 '가시'를 통해 시각화한다.
자라면서 한번쯤 들었을 법한 이야기들도 일종의 심리적 지배였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굉장한 불쾌감을 느꼈다.
주인공에게 공감할 수록 내 경험 또한 가시가 되어 나를 쿡쿡 찔러댔다.
그래서인지 일종의 구원자인 태주의 존재가 여간 반가운게 아니었다.
채원도 누군가의 태주가 되겠지. 반가운 연대다.
책을 읽고나서도 한참을 가시지 않는 의문 하나, 그래서 태주의 정체는 무엇일까?
2. 습지의 사랑
물귀신과 숲귀신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다.
무분별한 개발은 생태계의 모든 존재를 위협한다.
산지개발로 인한 산사태와 홍수로 인한 호수범람의 한가운데에서 두 귀신이 맞잡은 두 손은 무엇을 의미할까.
부디 이영과 여울이 맞잡은 두 손을 영원히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죽음과 소멸. 그 사이에서도 사랑이 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음울함, 질척질척함, 아련함이 공존하는 단편이었다.
3.칵테일, 러브, 좀비
뱀술에 남아있던 기생충이 좀비바이러스의 원인이 된다.
주인공은 가부장적 사상으로 똘똘뭉친 아버지,
그런 아버지 밑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억압된 삶을 살아온 어머니의 품에서 자랐다.
엄마와 딸은 이제 좀비가 된 아버지를 처리해야 한다.
함께하던 가족을 제 손으로 처리한다는 것은 쉽지않은 일이다.
특히 오랜시간을 함께 의지하며 살아온 아내의 경우에는 더 그렇다.
결국 이들은 자신의 손으로 가부장적 가정의 뿌리를 박살낸다.
좀비바이러스의 원인인 기생충은 굿을 통해 소멸시킨다.
가부장제+한국 민간신앙(굿)+외국 미신(좀비)의 대환장 삼중 콜라보레이션.
정부가 앞장서서 굿판을 벌이는 모습을 보고있자니, 최순실과 박근혜가 절로 연상된다.
4.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
아무리 애를 써도 정해진 결말을 바꿀 수 없다는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어머니를 살리려는 아들의 칼이, 남편을 살리려는 아내의 칼과 겹쳐진다.
서로의 간절한 바람은 서로를 겨눈다. 중반정도 읽었을 때 불현 듯 지나간 장면이 떠올랐고,
그 장면에 숨겨진 뜻을 깨닫는 순간 소름이 돋음과 동시에 눈물이 흘렀다.
어머니의 텅빈 눈동자에 담긴 아들의 모습과, 거울에 담긴 아들의 텅빈 눈동자.
가정폭력은 피로 얼룩진 슬픔을 짙게 남긴다. 각자의 간절한 소망과 엇갈리는 시간들이 계속 생각날 것 같다.
한 트친분은 ‘나라면 과도로 누굴 겨눌까 생각하니 한없이 참담해졌다.’고 하셨다.
죽음이 묻은 칼날 위에 새로운 죽음이 자꾸만 덧씌워진다.
제목과 이야기의 숨은 뜻을 발견하고 나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하고 참담해지는 단편이다.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
장편 잘쓰시는 건 이미 알고있으니, 오버랩으로 장편 한번 써주시면 좋겠다.
이미 완성된 이야기지만 더 깊은 이야기를 듣고싶다.
그의 글은 읽다보면 장면 하나하나가 선명한 애니메이션이 되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비극을 마냥 음울하게만 그리지 않는, 다채롭게 그려내는 데에 특화되어있는 작가.
인상깊은 구절
1. 그는 그대로인데, 그의 옆에 있는 동안 나는 너무 많이 바뀌었다.
이 상황이 아주 기이하게 느껴졌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잘못 들었는데, 어떻게 돌아갈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2.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그가 입을 벌리기도 전에, 그가 무슨 말을 내뱉을지 예상할 수 있었다.
정현은 내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말들을 지껄였다.
그건 꼭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문득, 그가 이런 말을 나뿐만이 아니라 또 다른 이들에게도 해 왔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3. "없으면 다시 만들면 돼. 네가 누구인지 이름을 정하는 거야."
처음 듣는 말이었다. 너무 가슴 떨리는 말이어서 자신이 이런 말을 들어도 되는지 두려웠다.
물은 고개를 푹 숙였다. 숲에게 들은 말이 어딘가 부끄러웠고, 이럴 때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몰랐다.
4. 마음에 들었다. 사실, 숲이 어떤 이름을 가져다 붙였어도 물은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숲의 이름처럼 이응이 두 번이나 들어가는 게 마음에 들었다. 한 쌍 같았다.
물은 수줍게 좋다고 답했다. 숲이 물의 축축한 손을 잡고 말했다.
"다음에는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는 거야."
5. 이제 하천도 없고, 숲도 없고, 마을도 없었다.
뒤집히고 뒤섞인 세상에서 여울과 이영은 서로밖에 남지 않았다는 듯이 몸을 붙였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 말든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은 젖은 흙냄새에 파묻힌 채로 눈을 감았다.
6. 엄마의 눈동자 주위로 실핏줄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바닥에 뒹굴던 리모컨을 주워 건네자, 엄마는 손톱 끝에 피가 몰릴 정도로 힘주어 전원버튼을 눌렀다.
문든 엄마가 아주 오랜 세월을 이렇게 보내 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순간순간 끓어오르는 감정들을 있는 힘껏 억누르면서.
7. 주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빠가 남긴 잇자국을 더듬었다.
그 잇자국은 꽤 오래 갔지만 분명하게 옅어졌고, 결국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었다.
8. 내 손에 들린 과도엔 이제 아버지의 피와 어머니의 피가 섞여 들었다.
우리는 가족이니. 그래, 가족이니 이제 내 피까지 섞인다면 우리는 과도 안에서 다시 살 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기가 싫었다. 죽어서까지 피가 섞이는 건 싫었다. 그래서 새 칼을 꺼냈다.
9. 지방에서 올라와 대학교 근처에서 홀로 자취를 하는 여대생이 범죄의 표적이 되는 것은,
흔하다는 표현을 넘어서 어떠한 상식 같은 것이다.
어떤 범죄자도, 온 가족이 함께 사는 집에서 통학하는 건장한 남자를 노리지는 않는다.
10.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그러하듯이, 사람의 인생이란 것이 그러하듯이,
이미 시작된 비극이 그러하듯이 그런 날들은 계속되지 않는다.
그런 날들은 짧기에 달콤한 것이다. 비극은 부메랑처럼 돌아오기 마련이고,
내가 해맑게 웃던 그 시점에 다시 우리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키워드: 과도, 가시, 가스라이팅(심리적 지배), 뱀술, 기생충, 초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