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독서기록

97. 흐르는 편지-20.06.22~06.24

독서의 흔적 2020. 6. 25. 11:26

한국소설 흐르는 편지 종이책 김숨 현대문학 ★★★★★

 

후기 '개개인의 삶이 역사와 기록이 되다'

책장을 덮고나서 한참을 고민했다.

읽었으니 기록을 해야하는데,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막막하다.

역사의 얼굴을 한 참혹한 비극 앞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한 단어 하나하나를 입 속에서 굴려본다.

생존한 피해자들이 역사이자 곧 증거다. 나쁜새끼들.’

<흐르는 편지>는 주인공 금자가 부치지 못할 편지를 강물에 흘려쓰는 이야기이다.

편지는 물길을 따라 흐르고 흘러 이윽고 강을, 바다를 가득 채운다.

주소도 없이 수신인을 찾아 헤매는 편지는 각국으로 끌려간 '위안부' 피해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열세 살 금자는 비단공장에 보내준다는 말을 듣고 집을 나선다.

기나긴 여정 끝에 도착한 곳은 중국인지 만주인지 알 수 없는 곳에 우뚝 서 있는 한 건물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시멘트바닥 곳곳에 흩뿌려진 피를 닦고나니, 23번이라는 번호표와 함께 구석진 방에 내동댕이쳐졌다.

상황을 파악할 틈도 없이 밀려들어오는 일본군을 받고서야 비단공장이 아니라 세계위안소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위안소여자는 위대하신 천황의 하사품이다.’

후유코(冬子). 글을 읽을 줄 모르지만, 팔뚝에 선명하게 새겨진 문신이 자신을 뜻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열세살. 지금으로 치면 한창 학교에 다닐 나이.

한글도 떼지 못했건만, 낯선 땅에 끌려와 식민 지배국의 이름을 얻었다.

행여나 영혼까지 뺏길새라 일본어는 입 밖으로 내지도 않았다.

매독을 앓고 얻어맞으면서도 악 다물고 있었더니, ‘곰살맞지 않다낙원위안소로 팔려왔다.

낙원위안소의 환경은 더욱 처참했다.

똥내나는 강물, 구더기가 들끓는 변소, 밀가루 반죽만 둥둥 떠다니는 희멀건 수제비,

비구미가 가득 박힌 꽁보리 주먹밥, 사방을 기어다니는 바퀴벌레와 각종 벌레들.

역병마저 피해갈듯한 낙원위안소.

혹자는 고통을 잊기 위해 아편을, 혹자는 반쯤 실성을, 혹자는 같은 조선인을 회피,

혹자는 일본군에게 더욱 친근하게. 저마다의 방법으로 생을 이어나간다.

어머니. 나는 아기를 가졌어요.’, 어머니, 나는 아기가 죽어버리기를 바라요.’

흐르는 강물 위에 손끝으로 쓰기 시작한 편지는 이제 아기 이야기로 가득하다.

영혼을 내어주지 않겠다고 했는데 금자의 뱃속에는 아기가 들어섰다.

죽기 싫다는 일본군에게 살아돌아오라고 해서일까. 아비는 누구일까.

심장이 생기기 전에, 입이 생기고 혀가 생기기 전에, 눈이 생기기 전에 죽었으면 했는데, 아기는 점점 커졌다.

뒤집혀서 죽은 아기를 낳은 언니가 있었다. 낳은 아기가 백일을 채 못살고 죽은 언니가 있었다.

아기를 키울 수 없어 위안소에 드나드는 중국인에게 넘긴 언니가 있었다.

총 세 번의 임신을 하고, 자신의 손으로 낙태를 한 언니가 있었다.

여자아기를 낳으면 조센삐-가 될 지도 모른다. 남자아기를 낳았으면 좋겠다.

아기가 죽었으면 했는데, 어느새 바깥 소리를 들을까,

몸 위에 올라탄 일본군의 얼굴을 볼까, 여자아기로 태어날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살아서 돌아오라고 했던 일본군이 한 언니를 죽였다. 금자는 더 이상 누구도 죽지 않았으면 한다.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살고싶다. 그리고 아기도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도 어머니에게 쓰는지, 자신에게 쓰는지 모르는 편지를 흘려보낸다.

어머니 오늘 밤 나는 아기를 낳을지도 몰라요. 닭띠 아기를요. 어머니, 그런데 나는 무슨 죄를 지은 걸까요.

무슨 죄를 지어서 이 먼 데까지 끌려와 조센삐가 되었을까요.’

 

김 숨 작가는 위안부생존자들의 고통을 체화시켰다.

그는 고통을 전시하지 않는다. 자극하게 그리지 않는다. 그저 그곳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실만을 묵묵히 써내려갔다.

삶은 삶이기에 삶의 이유와 당위를 제공한다. 형언 불가능하게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지고의 미덕은

결국 살아남아야 한다는 당위이며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생존은 충분히 경이로운 선이다.

그 이유 중 하나만 이야기하자. 이 소설은 살아남은 분들 덕분에 태어났다(해설인용)”

죽지 못해 산다.’ 죽는 것이 무서워서 살아남았다.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타자의 고통 속에서 생의 열망이 없는 삶을 보았다.

손 끝으로 그린 편지는 생과 죽음의 이야기를 품고 강물 위를 유유히 흐른다.

편지에는 죽음에 대한 그 어떤 잔혹한 표현도 없다. 생에 대한 뜨거운 열망도 없다.

금자의 편지는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나의 손 끝으로, 또다른 독자의 손 끝으로 가 닿는다.

물결에 쓴 편지는 그렇게 개개인의 삶의 기록이, 역사가 되었다.

역사는 개인의 삶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개개인의 삶이 모여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만든다.'

<흐르는 편지>는 죽음과 고통이 아닌 생존을 노래함으로써 그 어떤 책보다도 강인한 힘을 지닌 작품이다.

 

인상깊은 구절

1. 아기는 어째서 몸에서 가장 어두운 곳에서 빛어지는 걸까. 가장 깊은 곳이자 가장 슬픈 곳에서.

아기가 들어선 뒤로 나는 눈동자가 아니라 아기집이 내 몸에서 가장 슬픈 곳이라는 걸 알았다.

 

2. 몸이 죽어 땅속에 묻히면 어디가 가장 먼저 썩을까. 가장 슬픈 곳이 가장 먼저 썩을까.

아기집이 썩으면 아기도 같이 썩겠지. 나는 아기가 죽기를 바라지만, 아기가 썩는 것은 싫다.

아직 눈동자가 생기지 않았어도, 심장이 생기지 않았어도. 눈송이가 녹듯 아기가 내 몸에서 소리 없이 사라져버렸으면.

 

3. 신발들은 덜 낡았든, 심하게 낡았든 우리에게 한결같은 교훈을 준다.

그것은 세상 그 어떤 신발도 우리를 집에 데려다 줄 수 없다는 것이다.

 

4. 거울을 보지 않아 내 얼굴을 잊어버렸다. 아기에게 눈동자가 생긴 뒤로 나는 거울을 보지 않는다.

아기에게 내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아기가 내 얼굴을 보고는 기억하면 안 되니까.

 

5. 입으로 삼킨 것은 토할 수 있는데, 눈으로 삼킨 것은 토할 수 없다. 눈도입처럼 토할 수 있다면,

나는 내 몸에 다녀간 군인들의 얼굴을 토하고 싶다. 가장 처음 내 몸에 다녀간 군인의 얼굴을 가장 먼저.

 

6. 애순 언니가 미쳤는데도 오지상은 군인을 받게 한다. 그녀의 입은 헛소리를 해도, 그녀의 아래는 헛소리를 하지 않으니까.

 

7. 몸이 내 것이 아닌데 나는 어째서 몸을 떠나지 못하는 걸까. 새장 속 새처럼 몸에 꼼짝없이 갇혀 있는 걸까.

몸이 죽어야 몸에서 놓여날 수 있으려나. 심장이 멎고 숨이 끊어져야. 하지만 몸이 죽으면 나는 있을 데가 없다.

숨을 데가 없다. 군인들이 들끓는 낙원위안소에서 내가 숨을 데라고는 몸뿐이다.

 

8. 다시 태어나면 여자로 태어나고 싶지 않다. 남자로도 태어나고 싶지 않다. 남자로 태어나면 군인이 되어야 하니까,

총과 칼을 들고 전쟁을 해야 하니까, 사람을 죽여야 하니까.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다.

 

9. 내 영혼은 내가 죽어도 몸을 떠나지 못할 것 같다. 몸이 너무 가여워서 몸과 함께 썩을 것 같다.

 

키워드: 일본군'위안부', 낙원위안소, 세계위안소, 편지, 아기
꼬리(연결고리): 아이캔스피크, 허스토리

-고통을 자극적으로 부각시키지 않은 '위안부'생존자들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