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20.06.21~06.22

에세이 |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 |
종이책 | 김규진 | 위즈덤하우스 | ★★★★★ |
후기 '행복을 위해 싸우는 목소리'
이미 존재하는 사람이 존재를 증명받고, 허락받아야하는 아이러니.
중요한 순간마다 '존재의 부정'이라는 가상의 불안감과 맞서싸웠을 규진님.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문장에 뜨문뜨문 그런 마음이 숨겨져있다.
시종일관 밝고 긍정적인 어투를 유지하고 계시지만, '작가님 필력이 유쾌하고 재밌다' 하기에는 뒷맛이 쓰다.
정말 단단하고 강인하신 분이라 생각했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책 한 권으로 파악해도 되는 것일까.
'규진님은 강하고, 주변분들의 든든한 지지도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고 쉬이 말할 수 없는 것은
내가 그 입장이 되어볼 수 없기 때문이다.
KBS뉴스에 얽힌 에피소드를 읽을 때,
규진님 트윗에서 본 '먹고살만 하니까 저럴 수 있는거지'라는 무례한 말이 문득 떠올랐다.
먹고살만하든 아니든 누군가를 위해, 나를 위해 공식적인 석상에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큰 용기와 각오가 필요하다.
특히 소수자의 경우, 의도치 않게 해방을 위한 무게를 짊어지게 될 수도 있다.
(한 순간에 대표성을 띄게되는 그런 광경을 수도 없이 봤다.)
이미 누군가는 악플러를 고소한다는 말에, ‘사이다 썰’을 기다리고 있지않은가.
또 누군가는 결혼식 당시 ‘둘다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코르셋이다.’라며, 얼토당토 않는 말을 얹지 않았는가.
(이 반응에 대한 답이 책에 실려있다. 가부장제에 부역하는 행위라고 보기에는 우리 결혼식엔 ‘부’가 없다.
드레스는 나쁘고 턱시도는 좋다가 아닌, 드레스만을 강요하는 사회권력을 지양해야 한다. 책 읽다말고 기립박수쳤음)
나는 규진님이 그 무게를 짊어지길 바라지 않는다.
그저 지금처럼 본인의 행복을 위해 힘껏 싸우셨으면 좋겠다.
행복을 위해 싸우다보니, 모두가 행복해져버렸네요. 라는 동화같은 결말이 뒤따르면 일거양득이구요.
애초에 왜 한 사람의 삶을 '먹고산다'는 단순한 문제로 재단하는 걸까?
밝게 응수하시지만, 작은 악이 모여 큰 무리가 되는 법인데, 어느 누가 마냥 해맑을 수 있을까. 마음이 착잡하다.
규진님이 열심히 버티고 싸우며 이뤄냈을 일들, 그리고 미래의 누군가를 위해 하는 일들을 가볍게 폄훼하는 말들.
무례함을 넘어서 가히 폭력적이다.
하지만 그런 말들로 흠집을 내기엔, 규진님의 목소리에는 확신으로 가득찬 행복이 담겨있다.
책을 읽는 내가 행복해질 정도이다. 이쯤되면 걸어다니는 행복바이러스 아니신지. (귀여움+행복=규진님)
부디 이 책이 널리 읽혔으면 좋겠다.
성소수자도 매 순간 웃고, 울고, 행복해하는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으면 한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들의 존재와 권리를 허락할 자격이 없다는걸 알아야만 한다.
더 많은 사람이 이 작고도 큰 외침을 듣고, 변화가 앞당겨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상의 모든 성소수자와 규진님 부부의 무지갯빛 행복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그러니 규진님!! 앞으로도 노빠꾸 킵고잉!!!!!
+)제삿날에 아웃팅을 한 일화가 인상적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 큰 소리로 손녀의 성 정체성을 알렸다가는 아빠가 불효를 저지르게 될 것이다'
이 문장에는 이미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불효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정체성 하나로 순식간에 불효가 되는 손녀라니 이루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인상깊은 구절
1. 동화속 공주님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은 아니더라도,
레즈비언 할머니 부부는 드디어 건강보험료를 같이 낼 수 있게 됐다는 해피엔딩이면 좋겠다.
2. 이성애자는 자신이 언제부터 이성애자였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걸까? (중략)
자신의 정체성 확립 시점에 대해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니, 참으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동성애자인 나는, 계속 성찰을 반복할 수밖에.
3. 나는 일련의 사건을 약간의 사캐즘을 담아 "위력에 의한 강제 퀴어 프렌들리함"이라고 부른다.
물론 우리 회사 영업팀 직원들이 동 나이대 대비 열려 있기 때문에 빠르게 나를 받아들인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보수성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다니 참 모순적이고 유쾌하지 않을 수 없다.
4. 동성결혼인데 괜찮으시냐고 실장님한테 물었더니 그분이 뭐라고 하셨는지 아세요?
글쎄 다 같은 돈 아니냐고 하시지 뭐예요.
5. 조금은 이질적인 존재인 우리에게, 결혼 준비과정은 작은 정상성의 경험이었다.
언젠가는 돈을 내는 소비자가 아니어도 겪을 수 있길 바라는 그런 정상성.
6. 사실 나는 너희 엄마랑 동성동본 결혼을 했어. 외할아버지 반대가 심해서 내 본관을 다르게 말하고 다니기도 했고.
그런데 30년이 지난 지금 누가 동성동본 얘기를 하냐? 동성 결혼도 30년 뒤에는 아무 것도 아닐거야.
7. 미정부의 승인을 받고, 결혼식도 공개적으로 하고, 언론에 알려져도 우리는 아직 법적으로 미혼 여성이다.
하지만 우리는 앞으로 모험을 함께할 것이고, 매일 조금씩 작은 불편함과 싸워나갈 거다.
내가 집에 돌아오면 언니가 나를 기다리고 있거나, 언니가 돌아왔을 때 내가 언니를 기다리고 있겠지.
결혼이란 무엇일까? 바로 이런 게 아닐까.
8. 굳게 닫혀 있는 병을 한 명씩 돌려도 보고, 뜨거운 물도 붓고,
그 모습을 보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지고 시도하다 보면,
제가 열지 못하더라도 결국에 병은 열리게 되어 있지 않을까요? 분명 그럴 겁니다.
키워드: 성소수자, 동성결혼, 동성결혼법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