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은희-06.12~06.13
한국소설 | 은희 | 종이책 | 박유리 | 한겨레출판 | ★★★★★ |
후기 '세상의 모든 은희에게'
2014년의 기사를 바탕으로 4년간 치밀하고 신중하게 다듬은 이야기는 87년의 그날로, 2015년의 그날로 우리를 끌어당긴다.
끈덕지게 들러붙는 생생한 고통에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고싶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다 불현듯 떠오른 물음. 이 불행은 과연 생존자들만의 것일까.
이야기는 입양아 준이 친모의 검안서, 형제의 집 입소기록 카드를 전달 받으면서 시작된다.
준은 엄마인 은희가 수용소 내 폭력으로 숨졌고, 수감자의 강간으로 자신이 태어났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엄마를 알고있다는 미연을 찾아나섰지만, 미연 또한 형제의 집 피해자였기에 다가서기 쉽지않다.
그녀에게 던지는 질문조차 폭력이 될 수 있으므로.
준과 미연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두고, 은희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뒤쫓는 동행이 시작된다.
특별법 제정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병호, 형제의 집을 잊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미연,
폭력으로 숨진 엄마 은희의 흔적을 찾는 준, 형제의 집에서 발생한 동성 간의 성폭행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리는 은수,
탈출하는 은희를 죽기직전까지 폭행한 소대장 김무열, 은희의 죽음을 '신부전증'으로 조작한 산부인과 전문의 병국,
모든 기억을 잃고 홀로 남겨진 방인곤 원장, 모든 진실을 파헤치고자 했던 주태석 검사.
숨기고, 파헤치고, 잊혀지는 뒤엉킴 속에 각자의 길을 걸어간다.
그 끝에 도달한 진실에 온전히 비난 할 수 없는 것은, 누군가 짊어졌던 참혹한 무게를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은희는 실제 형제복지원 피해자 김계원을, 그리고 미연은 윤우택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김계원은 탈출하다 붙잡혀 폭행으로 인해 사망했으며, 윤우택은 심하게 다친 김계원의 가슴에 안티푸라민을 발라주었다.)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거리의 빈곤을 청소해야한다. 국가는 약자들을 한 곳에 가둘 명분을 만들었다.
길 가던 아이,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 취객, 친구와 놀던 아이, 목욕탕으로 향하던 사람.
온갖 사람들이 '부랑자를 갱생'하기 위해 형제복지원으로 납치되었다.
시설 곳곳에서 행해지는 폭력적인 행위들은 국가의 묵인과 함께 점점 대담해졌다.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알려고하지 않는 것이었고, 못본 척 하는 것이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해주는 이가 있으니 손 안대고 코 푸는 셈이었다.
생존자들이 입을 열었을 때 모두가 보았다.
국가가 약자들을 어떻게 취급하는지를. 그리고 가진 자의 손에 쥐어진 권력을.
그렇게 빈곤은, 약하다는 것은 공포가 되었고, 밀어내야 할 어떤 것이 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형제복지원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복제된 형제원들, 철장 밖 모두의 이야기였다.
빈곤층에게 가해지는 국가의 폭력을 보았기에 가난에 대한 부정적이 인식이 생겼고,
박인근을 감싸는 국가와 사법부를 보았기에 사회복지시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높아졌다.
정의의 여신상의 저울은 힘있는 자들 쪽으로 기울었고, 법전은 힘있는 자들의 궤변을 뒷받침하기 위해 펼쳐졌다.
국가의 시선은 더 높은 곳을 향했고, 약한 이들은 점차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지금도 수많은 형제복지원과 은희가 존재하고 있다. 87년에 시계가 멈춰버린 것은 생존자들 뿐일까.
생존자들의 피와 눈물섞인 농성끝에, 20대 국회의 마지막에 가까스로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비록 보상에 대한 것이 제외된 반쪽짜리 법이지만, 생존자들이 87년의 기억에서 한 발 앞으로 나아갈 디딤돌이 생겼다.
그리고 나도 작가가 얹어준 불행을 기꺼이 짊어지고 세상의 은희를 위해 조용히 손을 맞잡으려한다.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을지라도 두 눈으로 이 여정을 끝까지 지켜볼 것이다.
사실 책을 읽기 전에는 걱정이 많았다.
형제복지원을 두고 소설이 나왔다니. 조금만 헛디뎌도 자극적인 이야기로 이어질 위험이 있었다.
실제로 당시 기사들은 피해자들이 당한 가혹적인 행위를 집중조명 했다고 한다.
(예: 동성간의 성폭행, 수용자 간의 폭력행위)
책에서도 미연의 고백을 들은 언론들이 '형제복지원 피해자가 살인자로.' 라는 자극적인 기사를 보도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많은 것을 우려하며 읽었고, 기우에 불과했음을 깨닫기까지는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생존자들의 곁에서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온 작가님만이 쓸 수 있는 작품이었다.
<소년이 온다>가 한강만이 쓸 수 있는 글이라면, <은희>또한 박유리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타인의 고통이라 생각하여 외면해온 과거의 나를 반성하며,
87년의 은희에게로 나를 이끌어준 작가님께 감사인사를 드리고싶다.
+) 작가님이 2014년에 작성한 기사를 찾아봤다.
<형제복지원 3부작>을 두고 혹자는 잘 쓴 소설이라 말했다.
차마 믿기 힘든 소설같은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 현실이 소설로 옮겨졌다.
소설의 사실여부를 확인한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형제복지원이 존재했고, 누군가는 살아남았고,
누군가는 죽었으며, 누군가는 저 높은 곳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던 박인근은 치매로 과거의 잘못을 하나 둘 지워가며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작가님의 기사 링크.
http://m.hani.co.kr/arti/SERIES/624/
형제복지원 열다섯살 조장 태길이
형제복지원은 알려진 사건이다. ‘감금, 가혹행위, 노동력 착취, 성적 학대, 인권 유린이 잔혹했으며 탈출하다 실패한 원생이 맞다가 사망하기도 했다. 1975~1986년 형제복지원에서 숨진 사망자는
www.hani.co.kr
작가님은 이 기사로 2014년에 '올해의 여기자' 상을 받으셨다고 한다.
나름대로 이런저런 기사들 찾아봤는데, 3부작만큼 사실관계를 잘 정리한 기사는 못 봤다.
최근 부산일보에서 생존자 인터뷰 시리즈도 공개하고 있는데, 그 기사들도 여러모로 참고하기 좋다.
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20041317590514295
[살아남은 형제들] 01번째 증언 '죽을 때까지 맞았고, 살기 위해 때렸어요'
※편집자주-1987년 봄, 부산 사상구 주례동 백양산 자락 육중한 담장 너머로 '형제복지원'의 참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12년 동안 공식 사망자만 513...
www.busan.com
인상깊은 구절
1. 병호의 편지를 받은 순간부터 그는 거울 속의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거울 속의 얼굴에는 한 여자가 강간으로 임신한 밤과 그녀가 맞아 죽은 낮이 흘렀다.
2. 복지시설이란 이름으로 노숙인 시설이 운영됐기에 국가는 적은 비용으로 복지정책을 홍보할 수 있었다.
3. 기억은 28년이 지나서도 빛이 바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부식되고 사라지고 변하는데 그날만은 지워지지 않았다.
매년 새해 소망은 희미해졌으며 변치 않을 것 같던 약속들은 바람에 흩날렸다. 해가 바뀌면 새 달력이 벽에 걸렸으나
그날의 기억만은 그대로였다. 미연은 한 숟가락 남은 밥을 입에 넣었다.
밥그릇이 텅 비었는데 지나간 것들이 자꾸만 달려와 머릿속을 채웠다.
4. 그 밤, 우리는 세상 밖으로 달려나갔다. 모두와 이별한 밤이었다. 우리가 버려진 그날 이후 지금까지 누구도 폐기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누구도 폐기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5. 그들은 빈곤을 모아두면 풍요로워질 것으로 착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바
퀴벌레와 쥐퇴치 운동을 벌이듯이. 그렇게 우리는 청소됐다.
6. 살고 싶은 대로 살아지지 않았다. 살아왔던 방식대로 살고 있었다. 살아왔던 시간이 미연을 잠식해갔다.
형제의집에 감금된 시절, 그때의 억눌린 분노는 20년이 지나서도 심장에서 끓고 있었다.
7. 과거의 날들이 매일 미연에게 편지를 보냈다. 미연이 어디를 가더라도 편지는 죽을 때까지 수신자를 찾아올 터였다.
8. 빼앗긴 4년은 없던 일이 될 수 없었다. 표백할 수 없는 날들이었다. 기억은 그림자 같은 것이었다.
가위를 들고 들러붙은 그림자를 잘라내도 하루가 지나면 잘린 부위에서 새 그림자가 돋았다.
9. 방 원장에게는 10억 원이 넘는 횡령 죄도, 부랑인들을 가둔 감금죄도 적용되지 않았다.
가둔 이가 없으므로 부랑인들은 감금의 피해자가 되지 못한다. 거리에서 구걸하는 이들은 법의 바깥으로
폐기된 지 오래였다. 법의 보호는 무산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10. “사람이 되려고.” 은희는 끊어질 듯 가느다란 숨을 내쉬면서도 그 말을 한 음절씩 입 밖으로 밀어냈다.
은희의 낮은 목소리가 빗속에서 선명하게 들린다. 사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의 눈을 본다.
타인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확인한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보지 않은 것처럼 산아래 공사장으로 향한다.
11. 거기는 시간이 흐르지 않았어. 그렇고 그런 날들이 무한히 반복됐지. 어제는 오늘이 되고 오늘은 내일이 됐어.
더 나아질 것도 더 추락할 것도 없는 불구덩이였어. 고통이 영원하다는 걸 알면서 살아야 하는 거.
그게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거지. 미치지 않는 사람이 없었어. 미친 사람들은 빨간 약을 먹었어.
12. 나를 향해 사죄하지 않는 세계, 내가 사라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세상의 평화로움이 소름끼치게 무서웠습니다.
목욕탕 굴뚝 앞에서 느꼈던 무심한 평화로움이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13. 나의 죽음을 먹고 태어난 나의 아들, 나의 구원
나는
태어나지 않은 듯,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겠지만
너의 더운 피에 나의 젖과 피가 도니
안녕.
기억되지 않기를.
키워드: 형제복지원, 형제원, 박인근, 과거사법 개정안, 사회복지, 부랑인, 독재국가
꼬리(연결고리): 숫자가 된 사람들
-형제복지원 생존자들의 구술집. 상상을 넘어서는 가혹행위에 온몸이 아파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