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영초언니-20.06.10~06.11

한국소설 | 영초언니 | 전자책 | 서명숙 | 문학동네 | ★★★★★ |
후기 '청춘을 딛고 올라서서 맞이한 민주주의'
'영초언니'는 독재정권과 맞서 싸웠던 여성운동가들, 그 중 서명숙이라는 인물의 자전적 소설이다.
책에는 누구나 알 법한 사회운동(5.18 민주화 항쟁, 6월 항쟁 등)과 저명한 인사들의 이름(심재철, 유시민,이해찬 등)이 언급된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천영초, 이혜자, 서명숙의 이름을 몰랐다.
사회적으로 유명한 온갖 유명인사들 너머에 여성운동가들의 이름이 저 멀리 떨어져있다.
전쟁도 그랬다. 5.18 광주민주화 운동도 그랬다. 적지않은 여성이 함께했음에도 이들의 이름은 쉽게 지워졌다.
'운동권 여자들은 못생겼다.'는 인식을 단박에 깨트려버린 이혜자, 모든 약자들의 권리를 찾아주고 싶었던 천영초,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부수고 싶었던 서명숙, 그리고 홍자, 동자 등 여러 여성운동가들...
역사의 대격변 속에 누구보다 뜨겁게 응답했던 그들이 있었다.
그 어떤 단어로도 쉽게 묘사할 수 없는 천영초의 삶, 서명숙의 삶, 이혜자의 삶, 그리고 정문화의 삶.
저마다의 꿈을 품고 거리로 나섰던 이들은, 독재정권 타도를 위해 청춘을 바쳤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사고를 당해 후유증에 시달리고, 누군가는 법정에 섰으며, 누군가는 이들의 삶을 책으로 옮겼다.
우리는 이들의 청춘을 딛고 올라서서, 비로소 민주주의를 맞이했다.
운동가들의 글을 접할때마다 대체 어떤 원동력이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 일지 궁금했다.
나로서는 쉽게 상상하기 힘든 행동력이었다. 어째서 굴복하지 않았는지 알고싶었다.
영초언니를 읽고나서야 깨달았다. '사람답게' 살고자 함이었음을.
그들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은 모든 국민의 '사람다운' 삶을 위한 것이었음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한다.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이름들을 세상 밖으로 꺼낼 때가 되었다.
6월항쟁 33주년. 경찰청장은 이한열열사 어머니에게 사죄의 뜻을 전했다.
박종철의 추모벤치가 생겼다. 대통령은 그가 고문을 받다 숨진 대공분실을 찾았다.
정부 사상 처음으로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유공자 12명에게 훈장을 수여했으나
전태일, 박종철, 이한열 열사등은 훈장 대상자로 검토되지 않았다고 한다.
'민주화운동 유공자의 예우에 관한 법률'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아 훈장을 수여할 법적 근거가 없어서 이다.
어디까지를 민주화운동으로 볼 건지 사회적으로 합의되지 않았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다.
어렵다. 모두가 청춘과 목숨을 바쳐 이끌어낸 평화는 '기준'을 따지는 세력에 의해 아직까지도 폄훼당하고 있다.
책을 읽던 중 한 기사를 접했다.
유명했던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로 만들어진 남영동 대공분실에 대한 기사였다.
해당기사는 대공분실을 차례차례 이동하며, 당시 고문받던 운동가들의 공포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http://interactive.hankookilbo.com/v/namyoungdong/index.html
천재가 설계한 완벽한 고문밀실, 남영동 대공분실
360도뷰로 건물 곳곳을 둘러보세요.
interactive.hankookilbo.com
독재정권이 암묵적으로 동의한 잔혹한 폭력행위이다.
손에 붙든 정권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반대세력들을 피와 눈물, 죽음으로써 저지했다.
이보다 더 명백한 민주화운동이 어디있을까. 이보다 더 무고한 죽음이 어디있을까.
독재정권은 물러났고, 국민들은 투표권을 쟁취했다.
국민의 뜻을 따르고 이끌어나가는 국가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한 정치가 이루어지는 정치제도.
이를 민주주의라고 하고있다.
그토록 부르짖던 미래에 도달했음에도, 많은 이들의 수고는 '정당한' 행위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권리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잊은 듯 하다.
우리 모두가 과거에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외면하는 듯 하다.
조금만 방향이 틀어져도 '자격이 있는가'하는 서슬퍼런 칼날들이 들어오는 현 시국에,
더 이상의 발전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깊어지는 밤이다.
2000년에 기대한 바로는 2020년이야말로 뭔가 크게 달라져있을 줄만 알았다.
5. 18 민주화 운동이 폭동이라는 말부터, 6월 항쟁은 빨갱이들의 짓이라는 말에 이어,
정의연을 가리키며 '운동권들은 역시 돈을 보고 움직인다'는 말까지.
곳곳에서 들려오는 기사들은 이런 믿음을 자꾸만 좌절하게 만든다.
이런 생각을 곱씹던 중에 발견한 한 블로그.
"역동하는 민주주의에 어떻게 완성된 형태가 있을 수 있나. 우리의 민주주의는 물론 과거보다 발전했다고 생각하지만,
시지포스의 돌처럼 매순간 밀어올리지 않으면 언제라도 다시 굴러떨어지게 된다."(블로그 인용)
https://m.blog.naver.com/interojh/221996164039
6월 민주항쟁 33주년 / 6월 항쟁 10주기인 1997년에 나는
6.10 민주항쟁 33주년. 어제는 경찰청장이 고 이한열 열사 어머니에게 사과했다. 이한열은 연세대학교 2학...
blog.naver.com
이 흐름이 역행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글이다.
모두를 움직이게 했던 원동력이 무엇인지 뚜렷해진다.
밀어올리는 자와 밀어내는 자. 나는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나는 왜, 자꾸만 사회문제를 다룬 책을 읽는가.' 매번 머릿속을 괴롭히던 자기성찰적인 물음에 한가닥 실마리를 준 책이었다.
인상깊은 구절
1. 모든 간섭과 억압은 지금처럼 '여혐'으로 비난받기보다는 '기사도'로 미화되거나 포장되었다.
우리는 가라열에서 스스로를 존중하는 법을, 여성의 목소리를 내는 법을,
여자들끼리의 수다도 얼마든지 진지한 토론이 될 수 있음을 배우기 시작했다.
2. 가슴 치는 내게 언니는 너무 욕심내지 말라고, 네가 그들을 하루아침에 구할 수는 없다고,
시간이 흐르면 그들 스스로 자신들을 구하는 방법을 알게 될 거라고 다독였다.
3.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히브리 노예들처럼 언젠가 이 동토의 왕국에도 민주화의 봄이 오리라는
실낱같은 기대감으로 우리는 혹독한 겨울을 나고 있었다.
4. 1978년 봄, 교정에 핀 진달래는 더이상 단순한 꽃이 아니었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이라는
<진달래>의 가사처럼 핏빛 진달래는 이미 저세상으로 떠난 전태일 열사, 사전검속으로 잡혀가서 다시는 학교로
돌아오지 못한 선배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은유적 상징이었다. 꽃이 더이상 꽃으로만 보이지 않는 세상은 끔찍했다.
5. '우정과 사랑' 사이의 경계선에서 늘 어정쩡하게 서성대던 우리는 그날 화계사 솔숲에서 마음의 경계선을 훌쩍 뛰어넘었다.
연인이 됨과 동시에 헤어져야 하는 운명을 나는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전쟁터에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절망감과 절박감이
연인들을 솔직하게 만들고 격렬한 사랑에 빠뜨리듯이, 그때 우리도 그러했다.
6. 공포와 고문의 시간이 끝난 후 그들과 오무렇지 않게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나면, 그들이 내 이웃과 비슷한 보통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과연 다행인지 불행인지 자문하곤 했다. 어쨌거나 우리는 점점 '가까워져갔다'.
7.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순간, 뭐라 형횽하기 힘든 비참한 심경이 들더라고. 우리가 그토록 목숨 걸고 맞서 싸웠던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한 향수가 그의 딸을 다시 대통령으로 만들다니. 우리가 젊은 날 한 그 모든 일들이 역사로부터,
국민들로부터 모욕당하고 조롱받는 느낌이랄까. 박대통령이 당선된 뒤로 나는 텔레비전 뉴스만 봐도 내상을 입는 것 같아서
한동안 뉴스조차 보지 못했어.
8. 나는 그날, 학내에 상주하며 학생들을 이간질하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했던 경찰초소를 내 손으로 때려부순 날,
역사와 대중 앞에 스스로 떳떳해졌다. 이후 평생 나에 대한 자존감을 갖게 되었으므로, 이미 충분히, 평생 넘칠 만큼 보상을 받았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나는 그 어떤 형태의 보상도, 인정도 더는 필요 없는 사람이다 -이혜자-
9. 당신들은 이 법정에서 나와 내 동지들의 과거를 심판, 심리하는 것이 아니다. 사법부의 과오와 잘못된 판결을 스스로
돌아보길 바란다. 아무리 잘못된 조처와 폭압, 법체제 아래서도 그에 맞서는 저항수단으로서의 폭력은 한낱 폭행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뿐이라면, 감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내가 감히 견주려는 뜻은 아니지만, 일제강점기 윤봉길, 안중근 의사의 행위는
어떻게 평가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이혜자-
10.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았던 모든 것들이 달라지고 무너지고 무뎌진다. 정치적 입장도, 남녀간의 사랑도.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것이 변하고 바스러진다. 그러나 천영초, 그녀는 내 마음속에 늘 애틋한 풀각시처럼 남아 있다.
키워드: 독재정권, 박정희, 전두환, 사회운동, 운동가, 천영초
꼬리(연결고리): 체공녀 강주룡
-국가의 독립,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싸웠던 여성운동가 강주룡의 삶을 녹여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