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20.04.23~05.28

| 시 |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
종이책 | 이원하 | 문학동네 | ★★★★★ |
후기 '지금 바로 제주도로 떠나고싶게 하는 시'
'나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내내 화자의 온갖 감정을 은밀한 곳까지 드러내보인다.
날것이라고 칭하기엔 자연과 버무려 잘 어우러진 한폭의 수채화 같은 그런 감정을.
시를 읽는 동안 그의 그림자가 되어 희노애락을 함께했다.
그가 느끼는 모든 감정이 나의 것이 되었다. 함께 슬퍼했고, 외로워했으며, 소리내서 웃었다.
근 한달의 시간을 함께 지내보니, 화자와 부쩍 가까워진듯 하다.
자연과 감정을 두고 아름답게 노래하는 시.
곁에 두고 오래보고싶은 시.
두고두고 곱씹고 싶은 시.
"어렵지않았냐"고 묻는다면, "사실 모든 시를 이해하지는 못했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이해하고자 읽은 시가 아니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시를 사랑하는지가 궁금해서 읽은 시였다.
'시를 이해하려고 하지말고 일단 읽고, 느껴보세요.'라는 어떤 분의 말을 내내 품고 있었다.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읽었고, 그리고 나도 역시. 시를 사랑하게 되었다.
시를 생각하면 '화자의 심정을 서술하시오'가 떠올라 괴로운 사람이 있는가?
그게 바로 나다...
'나는 그에게로 가 꽃이 되었다.' 여기서 꽃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류의 주입식 수업들. 오로지 수능만을 위해 공부하던 시절.
수능을 치른지 1n년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도 그때의 공부법들이 날 괴롭히고 있다.
덕분에 각종 시와 비문학에 대한 일종의 공포심이 있었다.
단어 하나하나 화자의 의도를 이해해야 할 것 같았고,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시를 읽는 것은 실패했다 받아들였다.
올해 들어 온갖 책을 읽으면서도 시집만은 손대지 않았는데, 어느날 문득 시의 언어를 느껴보고 싶어졌다.
바로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고 어떤 시집이 좋을지 한참을 헤맸다.
부담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시를 찾고싶었다. 흘러가는 감정을 그래도 흘려보내도 좋을 시를.
한달 내내 고민하다가 겨우 고른 시가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이다.
읽는 김에 천천히 시를 느껴보자 싶어서 '한달 필사 챌린지'를 함께 했다.
속독-필사-낭독-정독의 순서를 꼭 지켰는데, 특히 낭독이 이 시집을 즐기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낭독을 하니 시에 대한 이해를 떠나, '마음에 와닿는다'는 감정을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마음에 품은 시가 몇 개 생겼는데, 더 언급하면 길어질 듯 하니 생략하도록 하겠다.
시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적어도 시를 읽는 즐거움은 알게되었다.
(사실은 서울에 살고, 술을 잘한다는 작가님의 TMI 마저 재밌는 시집이다.)
작가친필 사인본에 혹해서 사둔 시집이 두어권 더 있는데, 이 시들도 천천히 읽으며 즐길 예정이다.
인상깊은 구절
1. 다른 소리지만
자다가 들었는데 파도가 잔잔해지면
가슴을 쓸다가 마음이 미끄러진대요 -약속된 꽃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묻는 말들
2. 아파도 도달해야만 하는 지점을 기억하는데
나는 자꾸만 때를 미루고 있습니다
치과나 병원이면 이렇게 미루지 않았을 겁니다 -나는 바다가 채가기 만을 기다리는 사람 같다
3. 낑깡을 얼마나 크게
한 입 베어 물어야
얼떨결에 슬픔도 삼켜질까요 -싹부터 시작한 집이어야 살다가 멍도 들겠지요
4. 처음으로 검은 물을 마셨을 때
빈자리의 결핍을 보았어
결핍에게 슬쩍 전화를 걸었는데 받았어,
맞았어
결핍이 맞았던 거지 -빛이 밝아서 빛이라면 내 표정은 빛이겠다
5. 빨래를 하려고 일어났다가 오랜만에 쏟았다
내가 하도 울어서 바다가 생겼다
멍든 물을 뒤지다가 바람을 쓰러뜨렸다
파도도 내가 그랬다 -누워서 등으로 섬을 만지는 시간
6. 바다는 트럭도 삼키고 고양이도 삼키지만
중력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져요 그렇기 때문에
매일 밤마다 중력을 이기는 달을 보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에요 -귤의 이름은 귤, 바다의 이름은 물
키워드: 제주도, 수국,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