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20.05.16

한국소설 |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 |
전자책 | 조예은 | 안전가옥 | ★★★★★ |
후기 '달고 시큼한 분홍색 젤리. 먹어볼래요?'
이 책은 애니메이션화 해야만 합니다.
책 전체를 뒤흔드는 이 기괴한 분위기가 파프리카 같은 어마무시한 작품으로 만들 것 같다.
슬픔, 분노, 사랑, 열등감, 그리움. 온갖 감정이 뒤엉킨 분홍빛 젤리동산.
'젤리장수 정체가 뭘까?', '그래서 다른 젤리들은?' 여름날 녹아내린 젤리들 처럼 수많은 물음이 머릿속에서 흘러내렸다.
아무려면 어때. 나는 지금 그 어느때보다도 더 격렬하게 젤리가 먹고싶다.
달고 시큼한 향을 풍기는 분홍색 젤리를.
여기, 누구보다도 어른스러워 보이고픈 아이가 있다.
이름은 유지. 쉴새없이 싸워대는 부모 틈을 벗어나 다람쥐 통으로 향하는 아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유지 앞에, 달콤한 향을 풍기는 젤리장수가 나타났다.
"이 젤리를 먹으면 부모님이 떨어지지 않게 될거야."
ㅈ젤리를 가방에 넣은채 돌아와보니, 어느새 부모님은 온데간데 없다.
이곳저곳 헤매다 찾아간 미아보호소에서 비슷한 처지의 아이를 만난다.
끊임없이 울어대는 이 아이의 이름은 주아.
둘은 손을 꼭 붙들고, 넓디넓은 놀이동산 곳곳을 돌아다녔다.
겨우 만난 주아와 그의 엄마를 보며 유지의 어른스러움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아이다운 모습이 나타난다.
자신은 갖지못한 '부모 자식간의 뜨거운 정'에 대한 질투와 시기.
그는 무심결에 주아가 먹던 스무디에 젤리를 빠트린다.
휘휘젓는 빨대를 따라 녹아내린 분홍색 젤리.
스무디를 나눠마신 주아와 엄마 앞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모든 비극은 두 모녀의 비명과 함께 시작된다.
유지의 어른스러움, 주아의 울음, 사준의 열등감, 다애의 집착같은 사랑, 현경의 비뚤어진 신앙심.
어른의 눈치를 살피는 너무 일찍 철이 든 유지가 눈물겨웠다.
나이에 걸맞는 주아가 떼를 쓰는 모습을 보면 쉴새없이 귓가가 웅웅거렸다.
54+a를 되뇌며 악착같이 돈을 촞고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부정적인 사준이 쓰렸다.
사랑에 눈이 멀어 진실을 보지 못하는 다애의 두 눈이 한심했다.
본인 앞에 놓인 비극에 시달리다 한껏 비뚤어져버린 현경이 안타까웠다.
제각각의 이유로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 그리고 그 틈을 파고든 젤리장수.
무더운 여름날 녹아내린 이도, 운명을 달리한 이도 그저 흘러가는 강물처럼 사회의 빠른 변화 속에 묻혀 잊혀져갔다.
주아와 유지와 다른 분홍덩어리들의 행방은 이제 어디에서 들을 수 있으려나.
작가가 이들의 뒷 이야기를 더 풀어놓지 않은 것은, 사회가 스쳐지나가고 흘려보내는 이야기에
조금 더 귀기울이길 원해서인듯 하다.
다만, 아무래도 마음이 더 갈 수 밖에 없었던 유지와 주아의 이야기는 조금 더 들어보고 싶은 아쉬움이 남는다.
젤리장수가 모두에게 젤리를 나눠주었지만, 모든 '선택권'은 그들에게 있었다.
의도치 않은, 계산된, 기쁘게 받아든 선택 등 거절이라는 또다른 선택지가 있었음에도 이들은 젤리를 택했다.
외로움에 처해있던 이들에게 젤리는 어떤 존재였을까.
순간의 감정과 오래된 감정이 어떤 한 선택을 내리고, 그것이 하나의 결과를 낳는다는 점이 인생의 재미있는 부분이다.
뻔한 결과이든, 원치않은 결과이든 간에 말이다.
그래서 연애 시뮬레이션 같은 게임이 성행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겨울이었다면 이 비극의 모양이 달라졌을까?'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음, 역시 찌는듯한 무더위의 여름이었기에 가능한 비극이었던 걸로.
'그럼 여름이니만큼 젤리가 아니라 얼음, 아이스크림이었다면?'
음, 장시간 열에 노출되면 형태를 갖출 수 없을테니 이 또한 젤리였기에 가능한 비극이었던 걸로.
그러니까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여.름.) 대학살'은 최고의 제목인 것으로 하자.
어느 여름날 녹아내려 한덩이가 된 포도모양 젤리를 떠올린다.
가방 속에 곱게 넣어둔 젤리는 예년보다 뜨거운 여름을 버텨내지 못하고 봉지 안에서 녹아버렸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뭉뚱그려진 그것을 한입 한입 뜯어먹었더랬다.
여름이기에 맛볼 수 있었던 무더운 행복감이었다.
아무래도 올 여름에는 더위에 방치한 젤리를 먹지 못할것 같다.
아, 생각하다보니 젤리가 먹고싶다.
이가 녹아내릴 정도로 달고,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시큼한 젤리를.
인상깊은 구절
1. 그녀는 젤리를 들고 뛰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문제의 답을 알아낸 것처럼 후련했다.
어떤 소리도 낼 수 없게 목을 가로막았던 가시는 부드럽게 녹아 푸딩처럼 목구멍을 넘어갔다.
숨을 쉴 때마다 달큰한 향이 코와 기도를 간지럽혔다.
지금 공기에 흐르는 입자를 크게 확대한다면 분명 선명한 분홍색일 것이다.
2. 어렸을 때 엄마와 장을 보러 시내에 가면 나는 늘 투정을 부렸다. 가지지 못할 물건인 걸 알면서도 졸랐다.
엄마가 나에게 죄책감을 가졌으면 했다. 원하는 걸 쥐여 주지 못하는 엄마가 미웠다.
그럴 때마다 엄마의 눈에 깃든 서늘함이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3.홀로 남은 아이는 텅 빈 자신의 손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어린 시절의 내가 나를 바라봤다. 나는 나를 향해 한 발 한 발 내딛었다. 집에 데려다주어야 했다.
아무리 걸어도 간격이 좁혀지지 않았다. 어린 나는 여전히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나는 울 것 같은 기분으로 양팔을 내밀었다. 어린 내 얼굴은 붓으로 휘저은 물감처럼 뭉개지고,
어느새 그 자리엔 주아가 서 있었다. 나는 주아의 이름을 불렀다.
4. 떠나지 않는다느니, 영원히 함께 하자느니와 같은 허황된 말들을.
고양이는 어느 순간 그 주문 같은 말들에 휘둘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런 상황은 정말이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젤리는 카페 소파에서 앞구르기를 하며 해맑게 웃을 뿐이었다.
5. 누군가와 나눈 마음은 제 것인데도 완전한 제 것이 아니었다.
늙은 인간도, 그의 딸도, 녹아내린 그날의 인간들과도 그랬다.
결국은 전부 떠나가고 자신만 남았다. 남은 기억을 떠안는 존재는 늘 저뿐이었다.
제 마음 하나 온전히 지킬 수 없는데, 아주 오래 살아 봐야 과연 무슨 소용인가 싶다.
사족
재밌다, 젤리덕후는 이 책을 읽었어도 젤리를 계속 먹을 것이다.
얼핏 상상하면 끔찍할 것 같은 이야기인데, 젤리가 갖는 이미지 덕분인지
마냥 끔찍하지 않고 조금은 귀여운듯한 이야기였다. (젤리덕후의 편견이다)
이 책을 추천한 기현편집자님 쪽으로 큰절을 올리고싶다.
키워드: 젤리, 젤리장수, 분홍색 젤리, 꿈곰이, 꿈냥이, 소라 머리삔